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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핸콕의 포스터


몇일 전 (꽤나 전에) 영화 핸콕을 봤습니다.

슬픈 사랑이야기라는 짧은 평을 어디선가는 읽고 가기는 했는데, 정말 영웅 이야기를 빙자한 슬픈 사랑이야기였습니다. ㅠ,.ㅠ

엉터리 슈퍼맨 핸콕이라는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 정도에 그쳤던 영화 홍보가 실제 영화를 볼 때 반전을 만들어 내는 영화였습니다.

샤를리즈 테론의 부자연스러움이 계속 눈에 거슬렸는데...

그녀가 결국 그런 인물이었을 줄이야.


아주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



영화는 아주 만족스럽게 봤습니다.

액션이 좀 어설프고, 도대체 슈퍼 히어로들의 싸움에 망가지는 도시는 누가 책임져주나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윌스미스의 애잔한 눈빛이 계속 기억에 남는 연기 일품의 영화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마무리 부분의 핸콕이 쓰러졌다가 점차 힘을 내며 밖으로 밖으로 자신의 사랑을 위해 달려가는 부분이 너무 인상에 남았습니다.

그의 사랑은 그런 식으로 표현 되는구나. 얼마나 슬픈가. ㅠ,.ㅠ



영화의 구성도 꽤나 괜찮았습니다.

윌스미스의 눈빛과 샤를리즈 테론의 태도의 어색함을 영화의 중반부까지 호기심으로 끌고 가는 것은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재미있었어요.





링크: http://movie.naver.com/movie/bi/mi/photo.nhn?code=68944#



아래의 기사는 신동아에 실린 "소니 전 명예회장 오가 노리오, 혼다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에 대한 기사 전문입니다. (이렇게 스크랩해오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 죄송~)
(source: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262&aid=0000001530 )

꽤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가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다 소이치로씨가 남긴 말이라고 하는 "인간은 실패할 권리를 지녔다. 그렇지만 실패에는 반성이라는 의무가 따라붙는다"라는 문구는 꽤나 인상에 남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저도 제가 한말들이 다른 사람들에 인상 깊게 남을 남큼 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소니 전 명예회장 오가 노리오, 혼다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
[신동아 2008-06-25 10:31]
[신동아]

▼ 은퇴후엔 기업 대신 오케스트라 지휘 -오가 노리오

오가 노리오 소니 전 명예회장(위)과 혼다 소이치로 혼다 창업주(왼쪽).

기업의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CEO)을 예전엔 ‘월급쟁이 사장’이라 불렀다. 샐러리맨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겸손의 뜻이었을까. 그런 월급쟁이 사장이 물러나며 ‘퇴직 위로금’이란 명목으로 16억엔, 우리 돈으로 대략 150억원을 받았다. 혀를 내두를 만한 액수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월급쟁이 사장이 여기에 한 푼도 손대지 않고 공공시설을 지어 자신이 요양하며 말년을 보내는 동네에 기증했다는 사실이다.

2003년 여름, 일본에서의 일이다. 이 월급쟁이 사장은 오가 노리오(大賀典雄), 세계적인 기업 소니의 전 총수였다. 미국이나 유럽의 대기업 CEO 중에는 물러나면서 거액을 챙기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일본에서는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더구나 그것을 몽땅 사회에 환원한 경우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 갑론을박이 일었던 모양이다.

“그런 거액의 퇴직 위로금이 서민들 정서와 맞겠느냐”며 슬며시 트집을 잡는 딸보 같은 이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청춘을 바쳐 한 직장에서 반세기를 근무했고, 중역이 된 뒤 사장을 거쳐 명예회장에 오르기까지 30년 동안 소니 매출이 30배나 늘었으니 합당한 액수라는 반론도 나왔다. 심지어는 거액을 몽땅 공익사업에 내놓은 선행을 두고 자녀가 없는 탓에 가능했다고 은근히 폄하하는 수다쟁이까지 나타났다.

설왕설래가 있거나 말거나, 노리오는 퇴직 위로금 전액을 공공시설이 들어설 지방자치단체(나가노현 가루이자와)로 회사가 직접 송금하도록 했다. 기업이나 개인이 지자체에 기부할 경우 세금이 면제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렇게 하면 현행법에서는 소니가 퇴직 위로금으로 회계 처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안타까운 심정에 정부 당국에 특별 배려를 요청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도리 없이 4억엔 가까이 세금을 물었다. 이로 인해 당초 계획보다 예산이 줄어드는 바람에 노리오는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공공시설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당돌한 대학생

오가 노리오 소니 전 명예회장

그가 지으려는 공공시설은 다름 아닌 음악 홀이었다. 노인복지시설도 아니고 왜 하필 음악 홀이었을까. 의문의 답은 오가 노리오에게는 ‘월급쟁이 사장’이라는 직함 앞에 ‘성악가 출신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라는 괴상한 수식어가 하나 더 붙는 데서 찾아야 한다.

노리오는 1930년 시즈오카현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목재상이어서 여유가 있었던지 그는 진로를 예술 쪽으로 잡았다. 고향에서 고교 과정을 마친 다음 명문 도쿄예술대학 음악학부 성악과로 진학했다. 그는 바리톤이었다. 재학 중 소니의 전신(前身)인 도쿄통신공업사가 만든 테이프리코더를 연습 기재로 구입했는데 성능에 하자가 있었다. 노리오는 테이프리코더를 들고 곧장 회사로 찾아가 항의했다. 거기서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도쿄통신공업은 일본 패전 이듬해 문을 열었다. 모든 것이 쑥대밭이 된 가운데 오늘날 ‘천재 기술자’와 ‘천재 경영자’로 일컬어지는 이부카 마사루(井深大),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콤비가 손을 잡고 트랜지스터 개발을 목표로 창업한 기업이었다.

두 사람은 회사로까지 찾아와 거침없이 불만을 터뜨리는 당돌하기 짝이 없는 대학생의 지적에 귀 기울였다. 일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인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풋내기 중소기업 처지에서 이 예술대학 학생이 마음에 쏙 들었다.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노리오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성악은 성악대로 하고, 짬이 날 때마다 우리 회사에 와서 함께 일하자!”

오가 노리오와 각별한 우정을 나눈 세계적 지휘자 카라얀(왼쪽)과 번스타인.

‘촉탁’이란 타이틀로 첫 인연을 맺었다. 지금 흔히 이야기하는 ‘아르바이트’였으리라. 당시를 떠올리며 노리오는 “꿈을 꿈으로 끝내버리지 않고 현실사회에서 이뤄보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반드시 그것을 뒷받침해줄 사람이 나타나는 법”이라고 회상했다.

노리오는 대학을 마치자 독일로 유학, 국립 베를린예술대학 음악학부를 졸업했다. 노리오가 귀국하자 소니의 두 창업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반겼다. 그들의 청을 차마 뿌리치지 못한 노리오는 1959년 정식으로 소니 사원이 됐다. 그가 입사한 후에도 한동안 바리톤 가수로 활동한 것으로 미뤄볼 때 ‘대학생’과 ‘촉탁’이던 시절처럼 양다리를 걸치기로 미리 양해가 됐던 모양이다.

그에게 막중한 임무가 맡겨진 것은 광고부장과 디자인실장을 겸무하면서였다. 소니라는 브랜드의 초석을 놓는 작업이었다. 이때 그가 이룬 결실이 지금껏 ‘SONY 디자인’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노리오는 도쿄올림픽이 열리던 해(1964)에 불과 서른넷의 나이로 중역(이사) 자리에 오른 이래 승승장구했다. 사장, 회장, 이사회 의장, 명예회장.

노리오가 사장이 된 다음 소니는 잇달아 대형 뉴스를 쏟아냈다. 48억달러를 투자해 미국 컬럼비아영화사를 매수했는가 하면, 새롭게 내놓은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이 대박을 터뜨렸다. 그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자동차의 두 바퀴나 마찬가지다”는 지론을 폈는데, 플레이스테이션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합쳐 1조엔(2002년)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로써 게임기기 메이커의 독보적 존재인 닌텐도와 불꽃 튀기는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도 두고두고 화제를 뿌렸다.

베토벤 교향곡 9번

노리오는 회고담 ‘소니의 선율, 나의 이력서’에서 자신이 회사에 기여한 세 가지 부분을 적시했다. 브랜드 이미지 향상, 프로덕트 플래닝(상품개발), 스탠더드(표준규격) 마련이 그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런 염려도 했다.

“일본인들이 상쾌했던 ‘소니의 선율’을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을까? 맹렬하게 소니를 추격하는 한국의 삼성이 벌써 시가총액에서 소니를 능가했다고 한다. 일본 경제를 뒤덮은 어둠 속에서 밝은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교향곡에 빗대자면 이미 연주는 제3악장까지 나아갔다. 혼돈 가운데 가냘프게 시작된 제1악장의 테마는 첫 일제 테이프리코더였다. 이 테마는 트랜지스터로 크게 성장했다. 제2악장의 테마는 CD 발매를 계기로 한 디지털이었다. 그리고 제3악장에서는 영화와 게임을 위시한 소프트웨어에 대한 비중이 급격하게 높아간다. 피날레인 제4악장은 과연 어떻게 될까?”

2003년에 쓰인 위의 회고담에서 언급된 콤팩트디스크(CD) 개발에 얽힌 이야기 역시 흥미롭다. 노리오는 사장으로 취임하기 몇 해 전 네덜란드에 있는 필립스 본사를 방문했다. CD라는 신제품을 에워싼 필립스와 소니의 규격 조정을 위해서였다. 두 회사의 협의는 난항을 거듭했다. 그중에서도 CD의 기록시간을 얼마로 할 것인지를 두고 첨예하게 맞선 모양이었다. 필립스는 60분, 소니는 75분을 고집했다. 이때 노리오는 이런 근거를 내세우면서 필립스를 설득했다고 한다.

“기록시간의 길이는 악곡의 시간에서 역산해서 결정해야 마땅하다. 중요한 악곡을 CD 한 장에 담으려면 직경 12cm에 75분의 용량이 필요하다.”

결국 노리오의 호소가 받아들여졌다. 그가 단순한 기업가가 아니라 음악가이기도 했기에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LP 레코드에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이 다 수록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작품 수록에 필요한 시간 75분이 제시됐다는 것. 다만 일설에는 그것이 명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주장에 의해 채택됐다고도 한다.

카라얀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 노리오는 세계적인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미국의 레너드 번스타인, 그리고 번스타인의 라이벌이던 카라얀과도 절친한 사이였다. 먼저 번스타인과의 일화부터 소개하면, 번스타인은 무척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음악회의 막이 내리면 대개 밤 9시경인데, 언제나 수백명의 팬이 그의 사인을 받으려 줄지어 기다렸다. 그는 아무리 피곤해도 싫은 기색 없이 죄다 사인을 해줄 뿐 아니라 일일이 한 마디씩 말을 걸어줬다고 한다. “어디서 왔어요?” “몇 살이지요?” “오늘 연주는 괜찮았나요?” 등. 그러다 스스로 흥이 나면 팬의 뺨에 기습적으로 키스하는 버릇도 있었다.

“삿포로에서 연주회가 있어 번스타인이 일본에 왔을 때였다. 내가 직접 조종하는 자가용 비행기에 그를 태워 다녀왔다. 도쿄로 돌아오면서 번스타인이 ‘자네는 진짜 멋진 사나이야. 이렇게 기분 좋은 비행은 내 평생 처음이라니까!’라더니 갑자기 내 얼굴에 키스를 했다.”

그러니까 노리오도 번스타인의 번개 키스에 당한 셈이었다.

진정한 노익장

카라얀과의 우정은 번스타인보다 더 깊다. ‘소니 오가 노리오의 세계-끝없는 전설’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카라얀은 성격이 괴팍해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이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웬일인지 소니의 모리타 아키오, 오가 노리오와는 음악이나 비즈니스를 떠나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인이나 오스트리아인 중에도 카라얀이 그만큼 흉금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는 거의 없다.”

도쿄의 번화가인 시부야 인근 고급 주택가, 그중에서도 돌담으로 에워싸인 눈에 확 띄는 서양식 저택이 있다. 바로 모리타 아키오의 집이었다. 1977년 가을, 두 딸과 함께 일본에 온 카라얀이 이 저택으로 놀러왔다. 카라얀은 콘서트가 있는 날이면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풀에서 수영하는 버릇이 있었다.

마침 모리타의 저택에도 실내 온수풀이 있었다. 노리오는 그날 카라얀과 그의 예쁜 두 딸, 그리고 모리타와 더불어 풀에서 세상만사 잊고 물장구치며 놀았던 기억을 오래오래 잊지 못했다. 그런 우정이 있었기에 카라얀의 급작스러운 부음이 들려오자 노리오는 만사를 제치고 잘츠부르크로 달려갔다. 그 무렵 노리오는 소니에서 카라얀의 영상작품을 제작해 시판하기 위한 논의를 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노리오는 바쁜 비즈니스 스케줄에도 음악가로서의 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환갑이던 1990년에는 도쿄필하모니를 지휘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베를린 장벽이 있던 포츠담 광장에 세운 소니센터 낙성식에서는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해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연주했다. 그는 2001년 가을 베이징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던 도중에 쓰러졌고, 그로 인해 반세기 동안 정든 회사를 떠나 치료와 요양에 전념하기에 이르렀다.

노리오는 15세 때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다. 자전기록 ‘오가 노리오, 열다섯에 꿈을 말하다’에서 그는 독자에게 이렇게 권했다.

“내가 미답(未踏)의 길을 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꿈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 여러분도 자신의 꿈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꿈을 향해 걸어가길 빈다.”

오가 노리오가 마지막 정열을 바쳐 지은 음악홀에는 ‘가루이자와 오가 홀’이라는 간판이 붙었다. 객석 800석, 스테이지 면적 150㎡, 천장 높이 14.5m로 2005년 봄에 개관했다. 홈페이지에서 공연 스케줄을 살펴보니 2008년 5월초에 ‘오가 노리오 지휘 도쿄필하모니 교향악단’이라고 적혀 있다. 팔순이 지척인 양반이 더구나 요양 중인 몸으로 지휘봉을 잡는다니, 이런 걸 두고 진정한 노익장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 장례식도 마다한 미련 없는 삶 -혼다 소이치로

혼다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

태평양전쟁 패전 후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일본, 그 일본 경제계에 ‘하느님’이라는 닉네임이 붙은 두 명의 기업가가 있었다. ‘경영의 하느님’과 ‘기술개발의 하느님’. 앞은 세계적인 전기 메이커 마쓰시타의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요, 뒤는 역시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 혼다의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다.

1991년 여름, 일본 신문에 묘한 사진 한 장이 실렸다. 부음을 듣고 달려온 문상객을 문전축객하듯 돌려보내는 고약한 광경의 사진이었다. 장소는 도쿄 시내 아오야마에 자리 잡은 혼다의 모기업 혼다기연공업 본사 빌딩.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의 별세 뉴스가 세상에 알려진 다음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가뜩이나 자동차 탓에 길이 막혀 서민들이 애를 먹으니 절대 내 장례식은 치르지 말라!”는 소이치로의 별난 유언 때문이었다.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의 창업자가 문상객들이 승용차를 타고 몰려들 것을 염려하여 장례식 자체를 거절했다니 뉴스가 되고도 남았다. 유족과 지인들은 장례식 대신 ‘감사의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고인을 추모하는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다고 한다.

평생을 자동차 개발에 힘을 쏟았던 혼다 소이치로(왼쪽)는 작고하며 교통체증을 우려해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오른쪽).

혼다 소이치로. 영원한 기술자, 진정한 엔지니어. 타계하기 이틀 전에도 문병 온 후계자와 자동차 신기술에 관해 토론했다는 억척같은 ‘오야지’(그는 부하 직원들이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 구멍가게 같은 조그만 업체에서 친근함을 담아 주인에게 붙이던 ‘오야지’란 호칭을 더 반겼다. 한자로는 ‘親父’ 또는 ‘親爺’라고 적는다).

나중에 자전거포로 바뀌었지만 원래 소이치로의 집은 대장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망치를 두드려 뭔가를 만드는 광경에 익숙했던 셈이다. 게다가 소싯적 그는 방앗간에서 가솔린으로 정미기계를 돌리는 것과, 그때 풍겨 나오는 석유 냄새에 사족을 못 가눴다고 한다. 하필 방앗간이 집에서 10리나 떨어진 곳에 있어서 할아버지만 곤욕을 치른 모양이었다. 걸핏하면 소이치로가 할아버지를 조르는 통에 업고 방앗간 나들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反독서론’ 편 까닭

소이치로는 고향 시즈오카에서 오늘의 중학교라 할 고등소학교를 마쳤다. 하지만 학업에는 그다지 뜻이 없었다. 자전적 기록인 ‘털어놓고 하는 말(ざっくばらん)’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학교는 싫었다. 이과나, 4~5학년에 배우는 식물과 곤충도 힘들었다. 6학년이 되자 전지니 천평, 시험관 등의 기계류를 만지작거릴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제일 싫어한 과목은 습자(習字, 서예), 그 다음이 읽기였다. 산수도 기하처럼 추리적인 것은 좋았으나 통째로 외워야 하는 것은 질색이었다. 좋아하는 이과도 선생님이 ‘이 문제를 아는 사람은 손들어보라’고 하면 말로는 대답을 곧잘 했지만, 시험을 치면 엉망이 되고 말았다. 표현방법이 서툰 데다 습자를 싫어했던지라 글자를 쓰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답을 적지 못하고 답안지를 내기 일쑤였다. 손재주는 그럭저럭 쓸 만하여 물건을 만드는 데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글로 쓰는 것은 도통 젬병이었다. 그러니 작문이나 습자 시간이 되면 너무나 싫은 나머지 교정 뒷산의 나무 위에 올라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잦았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소이치로는 독서 역시 기피했다. “책에는 과거에 관한 것밖에 나와 있지 않다. 나는 책을 읽노라면 거기에 얽매여 어쩐지 퇴보하고 말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견딜 수 없다”는 반(反)독서론을 폈다.

“대체로 나의 인생은 보고, 듣고, 시험해본 다음 그것을 종합하여 이렇게 되는 게 옳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려왔다. 만약 모르는 일이 생겨 책을 읽어야 한다면 나는 그럴 시간에 남에게 물어보는 쪽을 택하겠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으로 소이치로는 중학을 마치자마자 도쿄에 있는 자동차 수리공장의 견습생이 되어 고향집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대장장이였으나 예사롭지 않은 인품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어린 나이에 고생길로 나서는 아들에게 ‘시간’의 공평함을 이야기한 것만 해도 그렇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왕이나 서민이나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것은 ‘하루 24시간’이라는 시간밖에 없다, 그러니 그 시간을 남보다 아끼고 귀하게 쓰라고 일렀다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돈도 아니고 지위도 아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아버지의 가르침도 평생 소이치로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언젠가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버지가) 훌륭한 가르침을 남겨주신 것이 나로서는 억만의 부(富)를 뛰어넘는 위대한 유산이며, 그 유산에 대해서는 지금도 깊이 감사드린다”고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적이 있다. 가난 속에서도 의젓한 삶을 가르친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 절절이 묻어나는 표현이었다.

‘인간 휴업’ 선언

‘혼다이즘’으로 세계 일류 자동차 회사로 우뚝 선 혼다 공장.

소이치로는 6년 동안의 견습생 수련을 거친 끝에 비로소 독립했다. 그의 자동차 수리 사업은 순조롭게 이뤄져 스물아홉에는 아내를 맞았다. 비록 전쟁통이었지만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아 수십건의 특허를 따는 등 착실하게 성장해나갔다. 그러나 지진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앗아갔다. 공장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는 깨끗이 손을 털고 일어섰다. 주변에 ‘인간 휴업’이라고 선언한 다음 1년을 푹 쉬기만 했다.

일본이 패전한 이듬해, 소이치로는 다시 기업을 일으켰다. 혼다기술연구소를 모체로 1948년에는 자본금 100만엔으로 20명의 종업원을 둔 현재의 혼다기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평생 고락을 같이한 영원한 동반자 후지사와 다케오(藤澤武夫)를 만났다. 이때부터 소이치로는 회사 경영은 부사장인 다케오에게 몽땅 맡기고, 자신은 오로지 기술개발에만 몰두한다. 그는 도쿄 본사에는 좀체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늘 공장에서 젊은 엔지니어들과 치고받고 어울리기를 즐겼다.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에피소드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느 날 혼다가 만든 부품 가운데 하나에서 문제가 발견됐다. 아이디어맨이기도 한 소이치로가 이렇게 고치면 어떨까, 저렇게 바꾸면 어떨까 하고 계속 의견을 제시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가는 생산 코스트가 너무 올라간다고 생각한 제작 담당자가 “1만개에 하나꼴이니까 고작 0.01%의 고장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냥 넘어가기로 하지요”라고 슬그머니 권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소이치로는 얼굴색마저 변하면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재수 없게 그 하나를 산 고객으로서는 확률이 100%잖아! 대관절 어디서 터무니없는 머리를 굴리려는 거야!”

소이치로 어록 가운데 ‘인간은 실패할 권리를 지녔다. 그렇지만 실패에는 반성이라는 의무가 따라붙는다’는 것이 있다. 그만큼 그는 도전정신을 높이 쳤다. 그의 또 다른 저서 ‘나의 생각’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람은 앉거나 누워 있을 때에는 넘어지지 않는다. 무엇을 하느라 일어서서 걷거나 뜀박질하기 시작하면 돌부리에 걸려 벌렁 자빠지기도 하고, 가로수에 머리를 부딪힐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머리에 혹이 나거나 무릎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앉았거나 누워서 뒹구는 녀석들보다 훨씬 낫다. 큰 상처를 입어 병원으로 실려가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다음번에는 그런 실패를 저지르지 않고 달려야겠다는 뜻 있는 경험을 하게 되는 법이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앉거나 드러누운 인간이, 상처를 입거나 혹이 난 인간을 보고 비웃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자들은 마지막에 가서 자신들이 비웃음을 사리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바보천치들이다.”

소이치로는 싸고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이 기술자의 책임이라고 늘 강조했다. 그러나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같은 제품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기계인지라 성능을 철저하게 체크해야 하며, 그것이 이 분야에서 일하는 기술자의 숙명이자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자동차의 리콜과 같은 사태를 일부러 기피하려는 기업에 대해서는 ‘도덕의 결여’라며 호되게 나무라기도 했다.

“2등은 필요 없다”

소이치로와 백년지기로 지낸 소니 명예회장 이부카 마사루는 소이치로가 타계한 뒤 ‘나의 벗 혼다 소이치로’라는 책을 펴냈다. 거기에 실린 ‘혼다씨의 골프 기술’이라는 항목이 웃음을 자아낸다.

소이치로는 환갑이 지나서야 골프를 배웠는데, 특유의 집중력과 탐구심을 발휘하여 실력이 금방 눈에 띄게 늘어났다고 한다. 어느 날 두 사람이 함께 플레이를 하게 됐다. 1번 홀에서 소이치로의 첫 티샷이 페어웨이 한가운데 서 있는 굵은 나무 아래로 굴러갔다. 그러자 소이치로가 대뜸 “이봐요, 캐디! 가서 톱 좀 가져와요!”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농담이었겠지만, 그것은 평소 장애물이 나타나면 그 장애물을 처치하고서라도 목표에 다가가는 소이치로의 삶의 철학을 반영한 에피소드로 들렸다. 그가 툭하면 “나는 설령 로빈슨 크루소의 외딴 섬에 떠내려가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으며, 기와 위에 씨를 뿌려도 싹을 틔우고 꽃이 피게 할 자신이 있다”고 장담했다는 이야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흔히 ‘혼다이즘’이라고 일컬어지는 혼다의 경영지침으로는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남의 흉내를 내지 마라. 둘째, 관공서에 의지하지 마라. 셋째, 세계를 겨냥하라. 여기에다 ‘만들어서 즐겁고, 팔아서 즐거우며, 사서 즐겁다’는 ‘세 가지 즐거움’이 보태지기도 한다. 그리고 ‘본업에 전념한다’는 사훈을 내세워 정치권과는 일절 교류를 거부한 것도 소이치로만의 고집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자신의 혈육을 끝내 기업으로 불러들이지 않은 것이 소이치로다운 가장 이색적인 기업관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은 주주들 모두의 것이지 어느 개인의 몫이 아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기업가는 물론이거니와 정치인들까지, 아니 하다못해 구멍가게에서도 세습이 일상화한 일본의 풍토에서 그것은 여간 돋보이는 고집이 아니었다.

당시 일부에서 소이치로의 동생이 중역으로 근무하는 것을 지적하며 은근히 비판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동생은 회사를 차리던 초창기부터 함께 일해 왔던지라 소이치로의 지론에 배치되는 예외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나이 66세 되던 1973년 가을, 느닷없이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경천동지할 발표를 했다.

“내 역할은 이제 끝났습니다. 오늘부터 사장 자리를 45세의 젊은 가와시마 군에게 넘깁니다. 앞으로도 혼다를 잘 부탁합니다.”

아직 한창 일할 나이에 평생 동지 후지사와 다케오 부사장과 나란히 일선에서 물러났다. 남들처럼 회장 감투를 쓰지도 않았다. 다케오와 똑같이 ‘최고고문’이라는 명예뿐인 지위를 지닌 채 은퇴한 것이다.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경영에 간섭하지 않았고, 때가 되면 스스럼없이 물러나는 이런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2008년 현재 혼다는 이 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제6대 사장이 이끌고 있다. 소이치로가 자신보다 한 걸음 먼저 세상을 떠난 다케오의 장례식에 참석해 “(정열을) 불태울 만큼 불태운 뒤 우리는 함께 혼다를 그만뒀다. 행복했던 인생에 감사하네!”라고 한 추도사에는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나던 날의 소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소이치로가 쓴 책 가운데 ‘내 손이 말한다’는 것이 있다. 한시도 손에서 망치를 놓지 않았던 그이기에 왼손은 상처투성이였다. 또한 오토바이 레이스에 열중한 바람에 사고를 당해 몸에도 온통 상처가 남아 있었다. 소이치로는 그걸 빗대어 ‘상처투성이 인생’이라며 웃음 짓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천성이 남에게 뒤지길 싫어했다. 아무리 상처투성이에 기름때에 전 작업복 차림으로 살아도 1등 제품을 만들고자 애썼다.

일본 정부가 그의 공로를 평가하여 ‘훈(勳) 2등’ 훈장을 수여하겠노라고 타진해왔을 때의 일화다. 소이치로는 뜸도 들이지 않고 획 고개를 모로 꺾었다. 그러면서 “2등은 필요 없다”고 쏘아줬다. 머쓱해진 일본 정부는 훗날 소이치로 사후에야 ‘훈 1등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추서할 수 있었다.

오늘날 세계 제일의 자동차회사로 꼽히는 도요타의 본거지 지명이 도요타시(豊田市)다. 원래의 동네 지명은 고로모였으나 대다수 주민이 도요타 덕에 생계를 이어가는지라 아예 지명마저 도요타로 바꿔버린 것이다. 1959년의 일이다.

“발명은 연애다”

혼다는 미에현 스즈카시에 공장을 지었다. 처음에는 스즈카보다 조건이 나은 기후현 오가키시 쪽이 유리했다. 그런데 현지를 둘러본 뒤 소이치로가 스즈카를 택했다. 그 까닭이 평소의 소이치로다웠다.

오가키 시청을 방문하자 냉방이 잘 된 방에서 오렌지주스 대접을 받았다. 반면 스즈카 시청에서는 담당 공무원이 떫은 차 한 잔을 내놓더니 성실하고 열성적으로 유치 설명을 했다고 한다. 소박하면서도 열의에 넘치는 그 태도가 소이치로를 반하게 만들었다. 그 후 공장이 완공되기 직전, 스즈카시가 도요타시를 흉내 내듯이 지명을 혼다시로 변경하면 어떻겠느냐고 건의해왔다. 보고를 받자마자 소이치로는 즉석에서 이런 논리를 내세워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전통 있는 지명을 일개인의 이름으로 바꾼다는 것은 얼토당토않다.”

하기야 그는 회사 이름을 자신의 성을 따 혼다라고 지은 것조차 두고두고 후회했다. 걸핏하면 오랜 친구 이부카 마사루가 회사 이름을 소니로 한 것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발명은 연애와 마찬가지다. 괴롭다고 여기면 괴롭다. 즐겁다고 여기면 이토록 즐거운 일이 따로 없다!”면서 공장의 엔지니어들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다그쳤다는 소이치로. 두 바퀴(오토바이)에서 세계 정상에 서자 네 바퀴(승용차)로 시야를 넓힌 그는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89년 미국의 자동차전당에 모셔지는 영예를 누렸다.

그렇게 세상의 이목을 끈 인물이 되고서도 “비행기는 이륙할 때보다 착륙할 때가 더 어려워. 인생도 마찬가지야!”라고 엄살 아닌 엄살을 떤 괴짜 영감, 그는 너무나 아름답고 멋지게 착륙의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세인들로 하여금 또다시 감탄하게 만든 뒤 먼 길을 떠났다.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yacho@hanmi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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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원티드 공식 포스터. 아무리 봐도 졸리의 너무나 가는 팔이 신경에 거슬린다.



토요일 조조로 보면 하루가 활기가 찰 만한 영화였다.

아주 오래 동안 영상들이 머리속에 남아서 장면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잘 만들었다.


내가 생각할 때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안젤리나 졸리를 폭스란 배역에 사용한 것이다.

그녀가 보여주는 눈 빛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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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눈빛. 이 표정. 연상녀의 여유로움이 넘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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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안젤리나 졸리의 매력은 도톰한 입술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눈빛만으로도 인상에 남는 배우가 된 것 같다.



처음 주인공을 찾아와 흐믓하게 녀석을 바라본 졸리는 배역에 맞게 느긋함과 여유로움이 넘처흘렀다.

주인공 웨슬리가 방직 창고에서 총으로 파리 날개를 쏘고, 자리를 벗어 날 때 폭스(졸리)가 길을 막자. 총을 겨누고 비키라고 한다.

그 때 씨~익 웃어주던 폭스(졸리)의 표정은...

꼭 장난기 가득한 누나가 연하의 남자를 재미있다는 식으로 보는 것 같았다.

뭐라고 더 표현하고 싶은데... 잘 표현이 안된다. ㅋㅋㅋ


안젤리나 졸리의 과거 배역들로 구축해 놓은 이미지가 여기서도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고 본다.

다만, 너무 말라서 좀 그랬다.







화려한 영상과 말도 안되는 총쌈도 압권이었던 영화.

그리고, 나름 스토리의 짜임도 알차고, 적당히 나 같은 저급한 눈에도 잘 보이는 스토리의 복선과 단서들도 소화하기 좋았다.

참. 영화 보면서 생각한 것인데... 헐리웃 영화는 정말 사람 죽는게 대수롭지 않나보다.

열차 추락도 그렇고, 방직 공장에서의 총질도 그렇고...너무 쉽게 죽이더라.




마지막 총알의 회전도 인상적이었다. 말도 안되지만...ㅋㅋ


링크: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66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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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띠에 소장품전의 홈페이지 인트로 화면 - 까르띠에의 보석과 우리나라의 단청이 대칭구조로 인상적이었다.

지난 토요일(6월 7일)에 까르띠에 소장품전을 보러갔습니다.

예전에 티파니 보석전이 괜찮았기 때문에 까르띠에 소장품전도 인상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방문 전에 인터넷을 통해 몇가지 평을 들었을 때 티파니 보석전 보다 까르띠에 소장품전이 더 괜찮다는 포스팅을 봤었기 때문에 약간 기대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티파니 보석전 보다는 좀 더 품격있는 느낌이 드는 전시품이었습니다.

티파니 보석전 때는 몇몇 작품들은 지나치게 세공을 많이 해서 조잡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들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군더더기로 느껴지는 작품들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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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르띠에 소장품전의 소개 (출처: 까르띠에 홈페이지)









전시 작품 중에 인상적인 것들이 많이 있기는 했지만, 오늘 포스팅의 주인공으로 소개하고 싶은 작품은 미스테리 클락이라는 탁상 시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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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 A 미스테리 클락(Model A Mystery Clock: Cartier Paris 1921; Height 13.35; 금, 플라티늄, 수정, 로즈 컷 다이아몬드, 오닉스, 흰색 에나멜)


시계의 어떤 점이 미스테리한가 위 사진을 보시고 아시겠나요?

실제 보면, 시계의 시침과 분침은 꼭 시계의 가운데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가운데 시계판은 투명한 수정으로 되어 있어서 뒤에 손을 대보면, 시침과 분침은 어떤 연결 장치도 없이 알아서 공중에서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가운데 부분을 확대한 이미지를 보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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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신기하게도 시침과 분침은 공중에 떠서 돌아갑니다. 자석으로 움직이는 걸까? 뭐지? 뭐지? 하면서 구경했습니다.

 
전시회 담당자 분께서 나중에 원리를 설명해 주신다며 일단 미스테리를 혼자 풀어 보라고 하더군요.

이 시계가 '스타일의 탄생'이라고 이름 붙은 전시 1관에 있었는데, 답은 2관에 가서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 아래 시계가 미스터리 클락의 원리가 초기에 적용된 모델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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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모양 시계(Combet Clock; Cartier Paris 1918;Diameter 7.80; 금, 플라티늄, 도금금속, 다이아몬드, 오닉스, 하늘색 에나멜, 흰색 에나멜)

시기적으로 봐도 혜성모양 시계가 1918년으로 1921년 제작된 모델A 미스테리클락보다 앞서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 시계를 봐도 알겠지만, 딱히 시침과 분침인 해와 혜성이 중심 축과의 연결도 없이, 알아서 빙빙 돌아갈 것처럼 보입니다.


^^




꼴에 공대생이라고 다이아몬드가 박힌 시계라는 사실보다는 시침과 분침이 떠서 돌아가는 원리가 기발해서 더욱 갖고 싶었던 아이템이었습니다.

정말로 하나 사서 책상에 올려두고 싶었습니다. ^^




물론 까르띠에 소장품전은 아름다운 작품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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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 루비가 인상적이었던 팔찌(Strap Bracelet; Cartier New York 1929; Length 17.05; 플라티늄, 루비, 다이아몬드)


위 팔찌는 파란색 사파이어로 포인트를 준 것과 같은 곳에 전시 되어 있었는데, 둘다 너무 이뻤습니다.






또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작품이 요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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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싶었던 표범 브로치(Panther Clip Brooch; Cartier Paris 1949; 6.00*3.70*3.00; 화이트골드, 플라티늄, 다이아몬드, 사파이어 카보숑)




솔찍히 사진들이 전반적으로 더 잘나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위 이미지는 실제 크기 보다 한참 더 크기 때문에 압도적인 느낌이 들지만, 실제로 보면 아기자기 귀엽습니다.

정말로 지구를 차지하고 있는 표범의 곡선미가 굉장히 유연하게 느껴졌던 작품입니다.






전반적으로 포스팅의 처음부분에 링크를 걸어 두었던 포스팅에서 언급된 것처럼 까르띠에 소장품전은 볼만했습니다.


유명 회화전도 그렇겠지만, 국내에서 이 정도로 대규모의 보석 전시를 볼 기회는 자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관람을 했는데, 다른 분들도 아직 시간이 있으니 기회가 된다면 꼭 구경하시기 바랍니다. (7월 13까지라고 합니다.)



링크: 까르띠에 소장품전 공식 홈페이지 http://www.artofcartier.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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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태 저 : 나비장책 : 2008년 04월






구매 일자
2008.04.28

나의 리뷰 : 5점 만점 중 3.5점

대학원 지도 교수님이신 박용태 교수님이 지으신
'이젠 테크노 경영이다'라는 책을 발견했다. 그냥 사무실 지하에 있는 영풍문고에 들려 읽을 만한 경영서적이 뭐가 있나 찾다가 바로 발견했다. 1판 찍은 날이 08년 4월 21일인데, 내가 책을 구매한 날짜가 04월 28일이었으니 얼마나 빨리 책을 구매한 것인가. 말 그대로 인쇄한 잉크가 마르기도 전을 책을 산거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ㅋㅋㅋ 교수님 저 기특하죠? ㅋㅋㅋ

그럼 아부는 이만하고 나름 객관적 서평을 해보자. 책은 기술경영을 몇가지 꼭지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내가 전공한 분야이기에 몇 개월만에 다시 공부하는 느낌으로 책을 읽었다. 아쉽게도 책의 설명 수준은 좀 애매하다고 느꼈다. 나는 그냥 과거 배웠던 내용을 리마인드하는 느낌으로 읽어서 나쁘지 않았지만, 기술경영을 아는 사람에게는 깊이가 부족해 보였고, 기술경영을 처음 들어보는 일반인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질 내용으로 보였다. 좀 어중띤 느낌이라고 할까. 하지만, 이 책을 실제 사업을 경영하는 사람이 본다고 하거나, 어느 정도 공학적 소양이나 경영학적 소양을 가진 사람이 본다면, 그 중에 흥미를 끌고 더 공부를 하거나 조언을 구하고 싶은 사람을 만드는 역할은 할 것 같다는 생각은 했다. 즉, 일종의 기술경영을 사람들에게 영업하는데는 잘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확실히 아직도 책을 편찬하시고,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교수님의 정열이 느껴져서 좋았다. 교수님 항상 건강하게 대한민국의 기술경영을 확고한 자리를 갖게 만들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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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 저/최정수 역 : 문학동네 : 원제 The Alchemist : 2001년 12월





구매 일자
2008.05.28

나의 리뷰 : 5점 만점 중 4점

내가 이 책을 살때 이 책의 광고 문구로 나왔던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라는 멋진 말과 제목에 나오는 '연금술사'라는 단어만 알고 있었다. 이 책이 베스트 셀러라 정말 많은 사람이 읽었다는 것이 최근 소설류의 책을 읽지 않아, 정서상의 메마름을 느끼던 나아게 충동 구매를 하도록 만들었다. 책을 주문하고 책을 읽기 전까지 난 이 책이 흥미진진한 소설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꼭 '천사와 악마'나 '다빈치코드' 같은... 왠지 연금술사들이 진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우주는 그것을 돕거나 방해하는... 하지만, 예상은 멋지게 빗나가고 책은 자아 성찰서로서 매사에 열심히 살아가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총평을 한다면 쉽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고, 새삼 내가 그릇된 방향으로 살아오지 않았구나 확인 할 수 있어 좋았다. 또한 어떤 방향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가를 다시 점검할 수 있었다.

책의 시작 부분에 괜히 인상에 깊었던 구절이 있다.

나르키소스가 죽자 연못이 그 사실을 아쉬워하며, "저는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저는 그가 제 물결 위로 얼굴을 구부릴 때마다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젠 그럴 수 없잖아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흔히 아는 나르키소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인데 생각지 못 했던 해석이었다. 나도 이 생각에 동조를 한다. 흔히 지동설(地動說)이나 천동설(天動說)을 이야기 하듯 가끔은 '아동설(我動說)' 또는 나동설이라며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돈다고 말하곤 하는데 (과거 화장품 Cara의 카피가 '세상을 나를 중심으로 돈다'였고, 심은하가 나왔던 그 광고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갖고 사는 것이 많은 경우 세상을 즐겁고, 책임감 있게 살 수 있는 비밀이라는 생각은 했다. 그냥 나르키소스의 연못 이야기에서 들었던 생각이다.


또, 책을 읽고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들은 '자아의 신화''표지'이다. 계속해서 반복해서 나오니 당연히 기억을 할 수 밖에 없다. '자아의 신화'라는 단어는 내가 가끔 사용하는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서 배운 매슬로의 5단계 욕구설의 최상위 욕구인 '자아실현의 욕구'와 같은 것으로 꽤나 친숙한 단어였다. 사실, 언제나 난 자아실현을 꿈꾸니까. 또한, '표지'라는 것은 이번에 새삼 배운 개념이었다. 매사에 '표지'를 찾아 감사하고, 확신을 갖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책에서 주인공은 표지를 읽을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저자는 독자들에게 표지는 언제나 가까운 곳에 있느니 주의깊게 표지를 찾고, 매사에 만족을 하고, 꿈을 찾아 여행을 하라고 말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나도 조금은 더 표지를 읽으려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가치였다고 본다.

물론 오해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지만, 짧은 시간에 다 읽고 짧지 않은 생각을 하게 해준 것에서 좋은 평을 해주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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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극장에 붙은 공식 포스터. 얼굴 크기로 본다면, 캐스피언과 사자가 주인공이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일요일에 이어 월요일은 나니아 연대기-캐스피언 왕자를 봤다.

프로젝트가 하나 끝나고, 아직 프로젝트에 본격 투입되지 않은 상태라 약간의 공백기라고 보면 된다.

회사에서 안절부절하며 있었는데, 선배님 말씀이 언제 또 이런 시간이 오겠냐라는 생각을 하며 지금은 그냥 지금을 즐기란다. ㅋㅋㅋ

그래서, 근처 회사에 근무하는 모 여성과 이 영화를 봤다.



영화 보기 전에 재미있다는 이야기와 내용이 어거지로 맞춰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봤는데...

역시나 내 수준은 딱 어린이 수준인 것 같다.

재미있었으니까. ㅋㅋㅋㅋ


누군가의 평처럼 영화에 나온 이야기들을 하나 하나 분석해서 보면, 영 스토리가 엉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류의 영화, 예를 들어 트랜스포머라던가 우리나라의 디워 등은 뇌를 잠시 집에 두고, 말초 신경과 감각만을 가지고 보면 충분하다고 본다. 그렇다고 정말 스토리가 엉망인 것도 아니고.

딱 내수준인 영화였다. ㅎㅎ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잠시 언급을 하자.
전편에 등장하여 결국 나니아 왕국의 왕과 여왕으로 등극까지 했던 4명이 후편에서도 다시 나오는데...
이 중 내가 볼 때는 제일 중요한 캐릭터가 요 아래 사진의 꼬맹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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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루시'이던가?


내가 포스터를 제작한다면 요녀석을 비롯한 다른 세명의 영웅들을 결코 저렇게 작게 넣지는 않을 것이다. ㅋㅋ

그리고 또 하나의 주인공은 잠깐 안 본사이에 어느 덧 성숙한 수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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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도 이쁜 얼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영국 여자아이 다운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제는 컸다고 키스씬도 나온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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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전능하신 나니아 세계의 통치자 사자 아슬란님 등장!!


이 놈의 사자는 도대체가 어떤 놈인지 모르겠다. ㅋㅋ 우렁찬 외침 하나에 나무들을 움직이게 하지 않나. 강물의 신을 불러내지 않나. 쥐의 잘린 꼬리를 생기게 하질 않나. ㅋㅋㅋ 멋진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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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에서 보나, 제목에서 보나 이 영화의 주인공임에 틀림없는 캐스피언 왕자.


대부분의 캐릭터가 나름의 성격을 갖고 보람 찬 연기를 보여줬다고 생각하지만, 캐스피언 넌 주인공이라고 하기에 너무 볼품 없었어. 비중도 없었고...
이것이 내가 내린 녀석의 평가이다. ㅋㅋㅋ



그리고, 이 영화의 재미 요소이자 진정한 주인공은... (네이버 영화 DB에 사진이 없어서 못 올린다만...)
나니아 왕국의 동물들이었다.


평범함을 거부한 nobleless 쥐와 아무것도 한 것도 없으면서 꾸준히 등장하다가 마지막에 눈치 있는 사람만 알아 챌 수 있게 손을 흔들어 주는 곰. 오소리 등이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이자 재미 요소였다.

나중에 보는 사람들 좀 더 관심을 갖고 우리 동물 주인공들을 살피는 여유를 갖기 바란다.





링크: 나니아 연대기2 공식 홈페이지 - http://www.narnia2.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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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나존스4의 공식 타이틀'인 듯한 이미지


아주 오랜만에 일요일 오전 조조로 영호를 봤다. 얼마만의 영화평 포스팅인가~ ㅋㅋㅋ

영화는 인디아나존스4 - 크리스탈 해골 왕국.

금요일날 만났던 사람들이 최근 개봉한 영화 중 인디4가 제일 재미있다고 해서 봤는데...


김남중의 평점은 5점 만점 중 5점. ㅎㅎ


나야 워낙 영화에 후한 점수를 주는 편이니 너무 심각하게 저 점수를 믿지는 말도록!!


다만, 영화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내가 어렸을 때 인디아나존스 시리즈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다시 느낄 수 있도록 4편을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액션 어드벤처물의 정통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앞편들의 속편이라고 불리기에는 역시나 완성도 높은 그냥 시리즈라고 해야만 할 것 같은 영화였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님께서 스타워즈 시리즈는 해리슨포드가 없어도 찍을 수 있지만,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해리슨 포드가 없다면 더 이상 찍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고 했을 정도로(누나에게 들은 이야기), 해리슨 포드의 열연이 빛나고, 또 눈부셨던 4편이었다.


내용이야 별개로 두고 (어차피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는 내용이 그럴 듯 하다는 평보다는 재미있었다는 평이 어울리는 영화니까.) 과거 시리즈가 인기를 얻자, 오락실에 등장했던 어드벤처용 게임기가 생각이 났다.

오락실에 흔히 있는 자동차 경주 게임처럼 2인승 트럭 같은 것에 앉아 타면, 탄광 레일 같은 것을 따라 달리기도 하고, 강물에 뛰어 들어 쫓기기도 하는 식의 어드벤처 시뮬레이션 게임이었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4편을 보면서 정말 그 때 그 기분을 다시 느꼈다.

존스가 채찍을 휘둘르고, 자동차 추격씬에서 카메라가 이리저리 흔들릴 때마다 나도 덩달아 몸을 움찔거렸다.
자동차가 폭포를 따라 떨어질 때는 나도 같이 '어~어~와!!!'라며 소리를 질렀으니, 4000원 조조 영화의 비용 대비 효용은 몇 갑절은 했다고 본다.



누나랑 같이 봤는데, 보고 나오면서 나중에 시간 될 때 앞편들을 다시 보자고 다짐을 했다. ㅋㅋㅋ



하여튼 유쾌하게 오랜만에 본 영화였다. 그리고 해리슨 포드 너무 멋 있어~~~


그 멋있는 해리슨포드가 더 멋있게 나온 역시나 그 분위기 인디아나 존스 공식 포스터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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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타이틀이 좀 구리긴 해도.. 분위기는 역시 인디아나존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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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왔다고 한다. 6월이 되기 전에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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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좀 멋이 없는 것 같기는 하다. 4편이란 것이 너무 강조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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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것도 사진을 그대로 사용해서 좀 내 취향에는 안 맞는 듯. 그냥 포샵으로 앞 두 장처럼 그림 느낌을 내는 것이 좋았을 텐데...뭐 개인적 생각이니까. ^^



또한, 이 영화에 또 다른 매력 요소였던, 과거 그 인물들의 재 등장.
내가 초등학교 때 불량식품을 사먹던 그 구멍가게, 그 문방구가 15년 뒤 가봤을 때도 그 대로 있을 때 느껴지는 그런 그리움이 느껴졌던 배우들... 그 들의 건강함에 감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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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꼬맹이 주니어 3세만 빼놓고는 전작을 담당했던 주역들이라고 한다.

내가 인디아나 존스 광팬은 아니라 한명 한명 누구라고 설명은 못 하겠지만, 4편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그리운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예전에 본 것 같은 생각과 그 사람을 떠올리는 재미가 있었다.

해리슨포드가 좀 더 오래 살아 마지막 장면에 모자를 주워쓰고 나가는 것이 5편을 내놓겠다는 것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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