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7/14, 화) 모딜리아니전을 봤다. 회사 고참들과 함께 상반기 마감을 서로 자축하고, 남은 하반기를 더 열심히 하자는 리프레쉬의 국내마케팅실만의 작은 이벤트였다.

운이 좋게도 원래 대상이 아닌 내가 꼽사리 껴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라는 작가도 알게 되고, 맛 있는 것도 먹은 꽤나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모딜리아니는 원래 내가 관심 있거나 잘 아는 화가는 아니다. 몽파르나스의 전설이라는 별칭이 붙은 화가라는데 개인적 성향으로는 아주 매혹적인 화가라는 느낌이 아니었다.
하지만, 35세의 나이로 폐렴에 걸려 젊은 나이에 생을 달리했다는 것과, 굉장히 많은 여자들과의 연애를 즐겼고, 31살 죽기 4년전 생애 마지막 연인인 17살 잔느 에뷔테른느를 만나 불 같은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4년간의 사랑 후 모딜리아니가 죽자, 여러 상황을 견디지 못 하고 뱃속의 둘째 아이와 함께 잔느 에뷔테른느가 자살을 했다는 것도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도슨트가 설명해주는 모딜리아니의 여성 편력을 들으면서, 역시 예술가는 여자한테 인기가 많구나 생각을 했는데, 근처에 있던 모딜리아니의 사진을 보니...
단순 예술가여서가 아니라 인물이 좋았군 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진에서 보듯이 미남이었다.)

그리고, 잔느 에뷔테른느도 아주 어리고 미인이었다. 잔느도 화가였다고 하는데, 그녀의 눈에 모딜리아니가 얼마나 멋 있게 보였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명을 듣고, 준비되어 있는 연대표를 보니 모딜리아니는 살아 생전에 평론이나 일반인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인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돈 없는 유태인 화가로서 모델을 살 돈도 없고, 풍족하게 이것저것 해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보니,
자신의 열정과 짧은 생을 인물화에 집중하여 일관되게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것이 후세에 더 큰 평가를 받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인물화 중심으로, 그 사람의 내면을 화폭에 담기위해 노력했고, 30대 중반에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누드화를 그렸던 모딜리아니.

도슨트의 설명에 따르면, 좀 길다랗게 그린 얼굴과 나이를 먹을 수록 간결해진 선처리, 그리고 누드화를 그렸을 때,
당시로서는 드물게 신화적 요소를 배제하고 순순하게 여체의 나신이 드러내는 아름다움만을 화폭에 담으려고 했던 노력이 그를 남과 다르게 만들었고, 좋은 평가를 받게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 그림을 마주하고 계속 보다 보면, 누드화의 경우 정말 여체에만 집중하여 그 아름다움을 보게 만든다.

내가 원래 좋아하던 신회적 요소들, 장식적 도구들이 전혀 없다. 마냥 현실적 곡선들도 아니고 색감도 아니지만, 매혹적이고 관능적인 입체감이 드러난다.



이번 전시는 연대기가 꽤나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35년간의 짧은 생이었기에 그를 위해 외우고 머리 속에 담아야할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그렇게 꼼꼼하게 연대기를 읽고, 작품들을 보니 14년 화가 인생 동안 변해온 화풍이나 관심 주제의 변화가 약간은 보였다.

작품을 보고, 이 작품은 몇 살쯤 그린 것이겠구나 예상해보고, 실제 연도를 보고, 연대기에서 다시 그 당시 그의 이야기를 확인해 보는 전시 관람이 꽤나 재미있었다.

이 같은 경험 떄문이었는지,
전시회를 나오며 떠오른 아이디어가
지금처럼 어떤 주제를 선정하여 그 화가의 작품들을 묶어서 전시회를 구성하는 것도 좋지만, 전시회의 시작 몇 일 또는 끝 몇일만이라도 주제에 맞춰 묶는 방식이 아니라, 작품을 만든 시간 순으로 작품을 전시해보는 것은 어떤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시간순으로 작품을 전시한다면, 더 그 화가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고, 또 어떻게 화풍이 바뀌어 왔는지를 더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여튼. 이제 곧 버스에서 내릴 시간이니
급 마무리 하련다.


오랜만의 전시회 관람이었고,
나중에 오면 아내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줘야지 하는 마음에 더욱 열심히 작품들을 살펴 봤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를 조금은 알게된 시간이었고, 무엇인가에 대한 일관된 관심과 노력이 그 사람을 위대하게 만든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 자리였다.


나도 내가 있는 위치에서, 지금 해야할 일과 해야할 역할에 최선을 다해서 일관된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양미술거장전에 대한 간단한 소개 - 공식 홈페이지에서 인용


사용자 삽입 이미지

루벤스, 바로크 걸작전의 간략한 소개 - 공식 홈페이지에서 인용





최근 "서양미술 거장전:렘브란트를 만나다"와 "루벤스, 바로크 걸작전"을 봤습니다.


그동안 국내에서 열린 "루브르 박물관전", "오르세 미술관전", "불멸의 화가 반고흐전", "서양미술 거장전", "루벤스, 바로크 걸작전" 등 주요 미술 전시회를 둘러보면서 이제 조금씩 서양 미술사나 화풍 등에 대한 이해가 생기는 듯 합니다.

사실, 군대에 있을 때 서양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회사에 입사하기 전 08년 2월 유럽여행을 하면서, 굉장히 많은 미술 작품들을 감상 할 수 있었던 것이 큰 공부가 된 것 같습니다.



이번에 17세기 주요 작가들의 그림을 보면서 느낀 것은 난 18세기 작품들을 좋아하는구나였습니다.
(두개의 전시회가 정말 큰 감명을 주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시간을 들여 제가 이해하고 있는 수준에서 제가 직접 본 작품들 위주로 포스팅을 하고 싶습니다.


특히 18세기 그림들 중에는 정말 부드럽고, 섬세한 유화들이 많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18세기 프랑스 화가인 다비드에게 좋은 인상을 받았었는데,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습니다.



오늘 집에 와서 과거에 미술전시회를 관람하고 사 두었던 도록을 보면서, 제게 인상이 깊었던 작품들을 추려봤습니다. 꽤나 시간이 많이 든 작업이었는데, 많은 공부가 되기도 했습니다.



조만간 클림트까지 만나고 와서, 김남중의 서양 미술사 이해를 정리해보렵니다. ㅋㅋㅋ



사용자 삽입 이미지

네이버에서 '시내 주차장'으로 이미지검색해서 찾은 그림(http://blog.naver.com/popopo800?Redirect=Log&logNo=30007400228 )


이익을 위해 소비자를 고려하지 않는 기업을 흔히 악덕 기업이라고 하겠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내가 "악덕 소비자"가 되었네. ㅠ,.ㅠ




나도 최근 조금씩 차를 가지고 이동하게 되었는데,

오늘(토요일) 마침 누나가 차로 회사 데려다 달라고 해서 아침 일찍 차를 끌고 나왔어.

누나 데려다 주고 영화관 가서 영화보고 회사쪽으로 가서 일을 할까 했어.


회사(종각역 영풍빌딩) 옆에 공영 주차장이 있는데, 토요일 오후부터는 무료거든.


그것만 믿고 종로쪽으로 왔는데, 10시 반쯤 되니까 시간이 맞는 영화도 없고, 영화를 봐도 주차가 무료인 것도 아니고. 그렇더라고...



결국 회사로 왔는데, 회사 건물은 한시간에 4000원, 공영주차장은 10분에 1000원이라네...

그 때가 약 10시 반즈음 되었으니까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약 3만원이 든다는 거잖아. 헉!




시내에 함부로 차를 가지고 오면 안되는 구나라는 것을 배우는 순간이었지. (참고로 난 최근에 제대로 운전 시작 ^^)






어떻게 할까? 갓길에 차를 세우고, 가고 싶은 회사 건물 앞에서 살짝 고민을 했지...

종로 한복판에 무료로 주차할 수 있는 곳...........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대기업이....(롯데 백화점 홈페이지에서 찾은 이미지)



결국 생각한 것이 백화점 주차장이었지.

내가 롯데 카드 발급하고나서 무료 주차 쿠폰 같은 것도 보내주던 것이 생각나서,

비록 쿠폰은 안가지고 왔지만, 잘 말하면 안내데스크에서 주차 도장 하나 찍어주지 않을까 생각을 한거지.



적어도, 영등포 롯데 백화점은 주차 공간이 모자라서 백화점이 인색하게 굴지는 않거든.
(영화보면 주차는 무료가 기본이고.. ^^)



갔더니 무료 주차를 못 해주겠다더군...

이쁘장한 안내 아가씨가 무슨 힘이있겠냐라는 것은 잘 알지만....괜히 불쾌해지더군.

쿠폰 안가지고 올 수도 있고, 나 같은 경우 매번 받던 쿠폰 한번도 안쓰고 잘 쇼핑해주다가, 처음 그런 혜택을 누려보고 싶다는데 도움을 안주네...


사실 이해는 되기야 하지. 나 같은 고객이 굉장히 많다고 하면, 분명 쿠폰 제도도 의미 없고, 주차장은 다른 일을 하러 온 손님들로 꽉차서 정작 쇼핑하러 온 손님들은 못 쓸테니까.





하지만, 서운했던 것은 서운했던거야.

갑작스레 차를 가지고 서울 시내에 왔다가 어딘가 주차를 해야 한다. 그런데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다.
그렇다면 서비스가 정말 좋은 백화점 주차장을 사용해볼 생각도 할테니까. ^^


결국, 2만원에 1시간, 5만원에 2시간, 10만원에 3시간 무료라는 주차권을 들여다 보다가...

물건을 사기로 마음 먹었지.







그리고, 월요일날 환불하기로.


사실 그럴 수 있다는 것(환불주차)은 "어떻게 할까? 물건을 살까? 지금 딱히 필요한 것이 없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약 15분 정도 백화점을 거닐다가 생각이 난것이야.



그 생각을 실행하기까지도 또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지...

너무 "악덕 소비자"가 되는 것 같아서...



(롯데 백화점은 오늘 주차 서비스 제공을 안해줘서 괴씸한 감정도 샀지만, 또 내가 환불주차를 하게 된 것 때문에 미안한 감정도 생겼어. 과연 이 두 감정이 나의 롯데 백화점 사용 패턴에 영향을 줄지 두고 보고 싶네..ㅋㅋㅋ 나름 꽤 충성 고객이고 볼륨 있는 고객이라고 ^^)




꽤나 많은 시간을 백화점에서 보내고 결국 15만원짜리 물건을 사고, 영수증을 들고 무료 주차가 안된다고 말 했던 이쁘장한 아가씨 앞으로 지나 회사로 갔지.





월요일날 물건은 환불되겠지........






오늘 배운 것은 시내로 함부로 차가지고 오지 말자.

시내에 무료로 또는 저렴하게 주차 할 수 있는 곳은 알아두자 (아시는 분들 Tip 좀 줘요~)

백화점 주차 쿠폰 같은 것도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까 잘 챙겨서 가지고 다니자. (특히 차가 있다면, 차에 넣어 두면 될것임)

회사 근처에 어쩔 수 없이 차를 세워두고 볼일을 봐야 할때는, 근처 대형상점에서 물건 구입후 주차한 뒤, 다음 날 환불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은 될 수 있다.






세상 약게 살려고 하면 알아야 할 것이 많네....


글 쓰면서 찾은 시내 주차 Tip (서울시내 공짜주차장 정보): http://blog.naver.com/popopo800?Redirect=Log&logNo=30007400228


아래의 기사는 신동아에 실린 "소니 전 명예회장 오가 노리오, 혼다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에 대한 기사 전문입니다. (이렇게 스크랩해오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은 듭니다. 죄송~)
(source: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262&aid=0000001530 )

꽤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가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다 소이치로씨가 남긴 말이라고 하는 "인간은 실패할 권리를 지녔다. 그렇지만 실패에는 반성이라는 의무가 따라붙는다"라는 문구는 꽤나 인상에 남을 것 같습니다.

나중에 저도 제가 한말들이 다른 사람들에 인상 깊게 남을 남큼 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소니 전 명예회장 오가 노리오, 혼다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
[신동아 2008-06-25 10:31]
[신동아]

▼ 은퇴후엔 기업 대신 오케스트라 지휘 -오가 노리오

오가 노리오 소니 전 명예회장(위)과 혼다 소이치로 혼다 창업주(왼쪽).

기업의 오너가 아닌 전문경영인(CEO)을 예전엔 ‘월급쟁이 사장’이라 불렀다. 샐러리맨이기는 마찬가지라는 겸손의 뜻이었을까. 그런 월급쟁이 사장이 물러나며 ‘퇴직 위로금’이란 명목으로 16억엔, 우리 돈으로 대략 150억원을 받았다. 혀를 내두를 만한 액수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월급쟁이 사장이 여기에 한 푼도 손대지 않고 공공시설을 지어 자신이 요양하며 말년을 보내는 동네에 기증했다는 사실이다.

2003년 여름, 일본에서의 일이다. 이 월급쟁이 사장은 오가 노리오(大賀典雄), 세계적인 기업 소니의 전 총수였다. 미국이나 유럽의 대기업 CEO 중에는 물러나면서 거액을 챙기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일본에서는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더구나 그것을 몽땅 사회에 환원한 경우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 갑론을박이 일었던 모양이다.

“그런 거액의 퇴직 위로금이 서민들 정서와 맞겠느냐”며 슬며시 트집을 잡는 딸보 같은 이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청춘을 바쳐 한 직장에서 반세기를 근무했고, 중역이 된 뒤 사장을 거쳐 명예회장에 오르기까지 30년 동안 소니 매출이 30배나 늘었으니 합당한 액수라는 반론도 나왔다. 심지어는 거액을 몽땅 공익사업에 내놓은 선행을 두고 자녀가 없는 탓에 가능했다고 은근히 폄하하는 수다쟁이까지 나타났다.

설왕설래가 있거나 말거나, 노리오는 퇴직 위로금 전액을 공공시설이 들어설 지방자치단체(나가노현 가루이자와)로 회사가 직접 송금하도록 했다. 기업이나 개인이 지자체에 기부할 경우 세금이 면제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렇게 하면 현행법에서는 소니가 퇴직 위로금으로 회계 처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안타까운 심정에 정부 당국에 특별 배려를 요청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도리 없이 4억엔 가까이 세금을 물었다. 이로 인해 당초 계획보다 예산이 줄어드는 바람에 노리오는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공공시설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당돌한 대학생

오가 노리오 소니 전 명예회장

그가 지으려는 공공시설은 다름 아닌 음악 홀이었다. 노인복지시설도 아니고 왜 하필 음악 홀이었을까. 의문의 답은 오가 노리오에게는 ‘월급쟁이 사장’이라는 직함 앞에 ‘성악가 출신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라는 괴상한 수식어가 하나 더 붙는 데서 찾아야 한다.

노리오는 1930년 시즈오카현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목재상이어서 여유가 있었던지 그는 진로를 예술 쪽으로 잡았다. 고향에서 고교 과정을 마친 다음 명문 도쿄예술대학 음악학부 성악과로 진학했다. 그는 바리톤이었다. 재학 중 소니의 전신(前身)인 도쿄통신공업사가 만든 테이프리코더를 연습 기재로 구입했는데 성능에 하자가 있었다. 노리오는 테이프리코더를 들고 곧장 회사로 찾아가 항의했다. 거기서 운명적인 만남이 이뤄졌다.

도쿄통신공업은 일본 패전 이듬해 문을 열었다. 모든 것이 쑥대밭이 된 가운데 오늘날 ‘천재 기술자’와 ‘천재 경영자’로 일컬어지는 이부카 마사루(井深大),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콤비가 손을 잡고 트랜지스터 개발을 목표로 창업한 기업이었다.

두 사람은 회사로까지 찾아와 거침없이 불만을 터뜨리는 당돌하기 짝이 없는 대학생의 지적에 귀 기울였다. 일리가 있었다. 무엇보다 인재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풋내기 중소기업 처지에서 이 예술대학 학생이 마음에 쏙 들었다.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노리오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성악은 성악대로 하고, 짬이 날 때마다 우리 회사에 와서 함께 일하자!”

오가 노리오와 각별한 우정을 나눈 세계적 지휘자 카라얀(왼쪽)과 번스타인.

‘촉탁’이란 타이틀로 첫 인연을 맺었다. 지금 흔히 이야기하는 ‘아르바이트’였으리라. 당시를 떠올리며 노리오는 “꿈을 꿈으로 끝내버리지 않고 현실사회에서 이뤄보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반드시 그것을 뒷받침해줄 사람이 나타나는 법”이라고 회상했다.

노리오는 대학을 마치자 독일로 유학, 국립 베를린예술대학 음악학부를 졸업했다. 노리오가 귀국하자 소니의 두 창업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반겼다. 그들의 청을 차마 뿌리치지 못한 노리오는 1959년 정식으로 소니 사원이 됐다. 그가 입사한 후에도 한동안 바리톤 가수로 활동한 것으로 미뤄볼 때 ‘대학생’과 ‘촉탁’이던 시절처럼 양다리를 걸치기로 미리 양해가 됐던 모양이다.

그에게 막중한 임무가 맡겨진 것은 광고부장과 디자인실장을 겸무하면서였다. 소니라는 브랜드의 초석을 놓는 작업이었다. 이때 그가 이룬 결실이 지금껏 ‘SONY 디자인’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노리오는 도쿄올림픽이 열리던 해(1964)에 불과 서른넷의 나이로 중역(이사) 자리에 오른 이래 승승장구했다. 사장, 회장, 이사회 의장, 명예회장.

노리오가 사장이 된 다음 소니는 잇달아 대형 뉴스를 쏟아냈다. 48억달러를 투자해 미국 컬럼비아영화사를 매수했는가 하면, 새롭게 내놓은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이 대박을 터뜨렸다. 그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자동차의 두 바퀴나 마찬가지다”는 지론을 폈는데, 플레이스테이션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합쳐 1조엔(2002년)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로써 게임기기 메이커의 독보적 존재인 닌텐도와 불꽃 튀기는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도 두고두고 화제를 뿌렸다.

베토벤 교향곡 9번

노리오는 회고담 ‘소니의 선율, 나의 이력서’에서 자신이 회사에 기여한 세 가지 부분을 적시했다. 브랜드 이미지 향상, 프로덕트 플래닝(상품개발), 스탠더드(표준규격) 마련이 그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런 염려도 했다.

“일본인들이 상쾌했던 ‘소니의 선율’을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을까? 맹렬하게 소니를 추격하는 한국의 삼성이 벌써 시가총액에서 소니를 능가했다고 한다. 일본 경제를 뒤덮은 어둠 속에서 밝은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교향곡에 빗대자면 이미 연주는 제3악장까지 나아갔다. 혼돈 가운데 가냘프게 시작된 제1악장의 테마는 첫 일제 테이프리코더였다. 이 테마는 트랜지스터로 크게 성장했다. 제2악장의 테마는 CD 발매를 계기로 한 디지털이었다. 그리고 제3악장에서는 영화와 게임을 위시한 소프트웨어에 대한 비중이 급격하게 높아간다. 피날레인 제4악장은 과연 어떻게 될까?”

2003년에 쓰인 위의 회고담에서 언급된 콤팩트디스크(CD) 개발에 얽힌 이야기 역시 흥미롭다. 노리오는 사장으로 취임하기 몇 해 전 네덜란드에 있는 필립스 본사를 방문했다. CD라는 신제품을 에워싼 필립스와 소니의 규격 조정을 위해서였다. 두 회사의 협의는 난항을 거듭했다. 그중에서도 CD의 기록시간을 얼마로 할 것인지를 두고 첨예하게 맞선 모양이었다. 필립스는 60분, 소니는 75분을 고집했다. 이때 노리오는 이런 근거를 내세우면서 필립스를 설득했다고 한다.

“기록시간의 길이는 악곡의 시간에서 역산해서 결정해야 마땅하다. 중요한 악곡을 CD 한 장에 담으려면 직경 12cm에 75분의 용량이 필요하다.”

결국 노리오의 호소가 받아들여졌다. 그가 단순한 기업가가 아니라 음악가이기도 했기에 상대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LP 레코드에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이 다 수록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작품 수록에 필요한 시간 75분이 제시됐다는 것. 다만 일설에는 그것이 명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주장에 의해 채택됐다고도 한다.

카라얀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 노리오는 세계적인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미국의 레너드 번스타인, 그리고 번스타인의 라이벌이던 카라얀과도 절친한 사이였다. 먼저 번스타인과의 일화부터 소개하면, 번스타인은 무척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음악회의 막이 내리면 대개 밤 9시경인데, 언제나 수백명의 팬이 그의 사인을 받으려 줄지어 기다렸다. 그는 아무리 피곤해도 싫은 기색 없이 죄다 사인을 해줄 뿐 아니라 일일이 한 마디씩 말을 걸어줬다고 한다. “어디서 왔어요?” “몇 살이지요?” “오늘 연주는 괜찮았나요?” 등. 그러다 스스로 흥이 나면 팬의 뺨에 기습적으로 키스하는 버릇도 있었다.

“삿포로에서 연주회가 있어 번스타인이 일본에 왔을 때였다. 내가 직접 조종하는 자가용 비행기에 그를 태워 다녀왔다. 도쿄로 돌아오면서 번스타인이 ‘자네는 진짜 멋진 사나이야. 이렇게 기분 좋은 비행은 내 평생 처음이라니까!’라더니 갑자기 내 얼굴에 키스를 했다.”

그러니까 노리오도 번스타인의 번개 키스에 당한 셈이었다.

진정한 노익장

카라얀과의 우정은 번스타인보다 더 깊다. ‘소니 오가 노리오의 세계-끝없는 전설’이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카라얀은 성격이 괴팍해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이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웬일인지 소니의 모리타 아키오, 오가 노리오와는 음악이나 비즈니스를 떠나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독일인이나 오스트리아인 중에도 카라얀이 그만큼 흉금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는 거의 없다.”

도쿄의 번화가인 시부야 인근 고급 주택가, 그중에서도 돌담으로 에워싸인 눈에 확 띄는 서양식 저택이 있다. 바로 모리타 아키오의 집이었다. 1977년 가을, 두 딸과 함께 일본에 온 카라얀이 이 저택으로 놀러왔다. 카라얀은 콘서트가 있는 날이면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풀에서 수영하는 버릇이 있었다.

마침 모리타의 저택에도 실내 온수풀이 있었다. 노리오는 그날 카라얀과 그의 예쁜 두 딸, 그리고 모리타와 더불어 풀에서 세상만사 잊고 물장구치며 놀았던 기억을 오래오래 잊지 못했다. 그런 우정이 있었기에 카라얀의 급작스러운 부음이 들려오자 노리오는 만사를 제치고 잘츠부르크로 달려갔다. 그 무렵 노리오는 소니에서 카라얀의 영상작품을 제작해 시판하기 위한 논의를 하던 중이었다고 한다.

노리오는 바쁜 비즈니스 스케줄에도 음악가로서의 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환갑이던 1990년에는 도쿄필하모니를 지휘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베를린 장벽이 있던 포츠담 광장에 세운 소니센터 낙성식에서는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해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연주했다. 그는 2001년 가을 베이징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던 도중에 쓰러졌고, 그로 인해 반세기 동안 정든 회사를 떠나 치료와 요양에 전념하기에 이르렀다.

노리오는 15세 때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고 한다. 자전기록 ‘오가 노리오, 열다섯에 꿈을 말하다’에서 그는 독자에게 이렇게 권했다.

“내가 미답(未踏)의 길을 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꿈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 여러분도 자신의 꿈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꿈을 향해 걸어가길 빈다.”

오가 노리오가 마지막 정열을 바쳐 지은 음악홀에는 ‘가루이자와 오가 홀’이라는 간판이 붙었다. 객석 800석, 스테이지 면적 150㎡, 천장 높이 14.5m로 2005년 봄에 개관했다. 홈페이지에서 공연 스케줄을 살펴보니 2008년 5월초에 ‘오가 노리오 지휘 도쿄필하모니 교향악단’이라고 적혀 있다. 팔순이 지척인 양반이 더구나 요양 중인 몸으로 지휘봉을 잡는다니, 이런 걸 두고 진정한 노익장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 장례식도 마다한 미련 없는 삶 -혼다 소이치로

혼다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

태평양전쟁 패전 후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일본, 그 일본 경제계에 ‘하느님’이라는 닉네임이 붙은 두 명의 기업가가 있었다. ‘경영의 하느님’과 ‘기술개발의 하느님’. 앞은 세계적인 전기 메이커 마쓰시타의 창업자인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요, 뒤는 역시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 혼다의 창업자인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郞)다.

1991년 여름, 일본 신문에 묘한 사진 한 장이 실렸다. 부음을 듣고 달려온 문상객을 문전축객하듯 돌려보내는 고약한 광경의 사진이었다. 장소는 도쿄 시내 아오야마에 자리 잡은 혼다의 모기업 혼다기연공업 본사 빌딩.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의 별세 뉴스가 세상에 알려진 다음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가뜩이나 자동차 탓에 길이 막혀 서민들이 애를 먹으니 절대 내 장례식은 치르지 말라!”는 소이치로의 별난 유언 때문이었다.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의 창업자가 문상객들이 승용차를 타고 몰려들 것을 염려하여 장례식 자체를 거절했다니 뉴스가 되고도 남았다. 유족과 지인들은 장례식 대신 ‘감사의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고인을 추모하는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다고 한다.

평생을 자동차 개발에 힘을 쏟았던 혼다 소이치로(왼쪽)는 작고하며 교통체증을 우려해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오른쪽).

혼다 소이치로. 영원한 기술자, 진정한 엔지니어. 타계하기 이틀 전에도 문병 온 후계자와 자동차 신기술에 관해 토론했다는 억척같은 ‘오야지’(그는 부하 직원들이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 구멍가게 같은 조그만 업체에서 친근함을 담아 주인에게 붙이던 ‘오야지’란 호칭을 더 반겼다. 한자로는 ‘親父’ 또는 ‘親爺’라고 적는다).

나중에 자전거포로 바뀌었지만 원래 소이치로의 집은 대장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망치를 두드려 뭔가를 만드는 광경에 익숙했던 셈이다. 게다가 소싯적 그는 방앗간에서 가솔린으로 정미기계를 돌리는 것과, 그때 풍겨 나오는 석유 냄새에 사족을 못 가눴다고 한다. 하필 방앗간이 집에서 10리나 떨어진 곳에 있어서 할아버지만 곤욕을 치른 모양이었다. 걸핏하면 소이치로가 할아버지를 조르는 통에 업고 방앗간 나들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反독서론’ 편 까닭

소이치로는 고향 시즈오카에서 오늘의 중학교라 할 고등소학교를 마쳤다. 하지만 학업에는 그다지 뜻이 없었다. 자전적 기록인 ‘털어놓고 하는 말(ざっくばらん)’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학교는 싫었다. 이과나, 4~5학년에 배우는 식물과 곤충도 힘들었다. 6학년이 되자 전지니 천평, 시험관 등의 기계류를 만지작거릴 수 있어 너무 좋았다. 제일 싫어한 과목은 습자(習字, 서예), 그 다음이 읽기였다. 산수도 기하처럼 추리적인 것은 좋았으나 통째로 외워야 하는 것은 질색이었다. 좋아하는 이과도 선생님이 ‘이 문제를 아는 사람은 손들어보라’고 하면 말로는 대답을 곧잘 했지만, 시험을 치면 엉망이 되고 말았다. 표현방법이 서툰 데다 습자를 싫어했던지라 글자를 쓰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답을 적지 못하고 답안지를 내기 일쑤였다. 손재주는 그럭저럭 쓸 만하여 물건을 만드는 데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글로 쓰는 것은 도통 젬병이었다. 그러니 작문이나 습자 시간이 되면 너무나 싫은 나머지 교정 뒷산의 나무 위에 올라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잦았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소이치로는 독서 역시 기피했다. “책에는 과거에 관한 것밖에 나와 있지 않다. 나는 책을 읽노라면 거기에 얽매여 어쩐지 퇴보하고 말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견딜 수 없다”는 반(反)독서론을 폈다.

“대체로 나의 인생은 보고, 듣고, 시험해본 다음 그것을 종합하여 이렇게 되는 게 옳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려왔다. 만약 모르는 일이 생겨 책을 읽어야 한다면 나는 그럴 시간에 남에게 물어보는 쪽을 택하겠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으로 소이치로는 중학을 마치자마자 도쿄에 있는 자동차 수리공장의 견습생이 되어 고향집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대장장이였으나 예사롭지 않은 인품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어린 나이에 고생길로 나서는 아들에게 ‘시간’의 공평함을 이야기한 것만 해도 그렇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왕이나 서민이나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것은 ‘하루 24시간’이라는 시간밖에 없다, 그러니 그 시간을 남보다 아끼고 귀하게 쓰라고 일렀다는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돈도 아니고 지위도 아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는 아버지의 가르침도 평생 소이치로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언젠가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아버지가) 훌륭한 가르침을 남겨주신 것이 나로서는 억만의 부(富)를 뛰어넘는 위대한 유산이며, 그 유산에 대해서는 지금도 깊이 감사드린다”고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적이 있다. 가난 속에서도 의젓한 삶을 가르친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 절절이 묻어나는 표현이었다.

‘인간 휴업’ 선언

‘혼다이즘’으로 세계 일류 자동차 회사로 우뚝 선 혼다 공장.

소이치로는 6년 동안의 견습생 수련을 거친 끝에 비로소 독립했다. 그의 자동차 수리 사업은 순조롭게 이뤄져 스물아홉에는 아내를 맞았다. 비록 전쟁통이었지만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아 수십건의 특허를 따는 등 착실하게 성장해나갔다. 그러나 지진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앗아갔다. 공장 건물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는 깨끗이 손을 털고 일어섰다. 주변에 ‘인간 휴업’이라고 선언한 다음 1년을 푹 쉬기만 했다.

일본이 패전한 이듬해, 소이치로는 다시 기업을 일으켰다. 혼다기술연구소를 모체로 1948년에는 자본금 100만엔으로 20명의 종업원을 둔 현재의 혼다기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평생 고락을 같이한 영원한 동반자 후지사와 다케오(藤澤武夫)를 만났다. 이때부터 소이치로는 회사 경영은 부사장인 다케오에게 몽땅 맡기고, 자신은 오로지 기술개발에만 몰두한다. 그는 도쿄 본사에는 좀체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늘 공장에서 젊은 엔지니어들과 치고받고 어울리기를 즐겼다.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에피소드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느 날 혼다가 만든 부품 가운데 하나에서 문제가 발견됐다. 아이디어맨이기도 한 소이치로가 이렇게 고치면 어떨까, 저렇게 바꾸면 어떨까 하고 계속 의견을 제시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가는 생산 코스트가 너무 올라간다고 생각한 제작 담당자가 “1만개에 하나꼴이니까 고작 0.01%의 고장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냥 넘어가기로 하지요”라고 슬그머니 권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소이치로는 얼굴색마저 변하면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 바보 같은 녀석아! 재수 없게 그 하나를 산 고객으로서는 확률이 100%잖아! 대관절 어디서 터무니없는 머리를 굴리려는 거야!”

소이치로 어록 가운데 ‘인간은 실패할 권리를 지녔다. 그렇지만 실패에는 반성이라는 의무가 따라붙는다’는 것이 있다. 그만큼 그는 도전정신을 높이 쳤다. 그의 또 다른 저서 ‘나의 생각’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람은 앉거나 누워 있을 때에는 넘어지지 않는다. 무엇을 하느라 일어서서 걷거나 뜀박질하기 시작하면 돌부리에 걸려 벌렁 자빠지기도 하고, 가로수에 머리를 부딪힐 수도 있다. 하지만 설령 머리에 혹이 나거나 무릎이 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앉았거나 누워서 뒹구는 녀석들보다 훨씬 낫다. 큰 상처를 입어 병원으로 실려가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다음번에는 그런 실패를 저지르지 않고 달려야겠다는 뜻 있는 경험을 하게 되는 법이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앉거나 드러누운 인간이, 상처를 입거나 혹이 난 인간을 보고 비웃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자들은 마지막에 가서 자신들이 비웃음을 사리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바보천치들이다.”

소이치로는 싸고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이 기술자의 책임이라고 늘 강조했다. 그러나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같은 제품은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기계인지라 성능을 철저하게 체크해야 하며, 그것이 이 분야에서 일하는 기술자의 숙명이자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자동차의 리콜과 같은 사태를 일부러 기피하려는 기업에 대해서는 ‘도덕의 결여’라며 호되게 나무라기도 했다.

“2등은 필요 없다”

소이치로와 백년지기로 지낸 소니 명예회장 이부카 마사루는 소이치로가 타계한 뒤 ‘나의 벗 혼다 소이치로’라는 책을 펴냈다. 거기에 실린 ‘혼다씨의 골프 기술’이라는 항목이 웃음을 자아낸다.

소이치로는 환갑이 지나서야 골프를 배웠는데, 특유의 집중력과 탐구심을 발휘하여 실력이 금방 눈에 띄게 늘어났다고 한다. 어느 날 두 사람이 함께 플레이를 하게 됐다. 1번 홀에서 소이치로의 첫 티샷이 페어웨이 한가운데 서 있는 굵은 나무 아래로 굴러갔다. 그러자 소이치로가 대뜸 “이봐요, 캐디! 가서 톱 좀 가져와요!”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농담이었겠지만, 그것은 평소 장애물이 나타나면 그 장애물을 처치하고서라도 목표에 다가가는 소이치로의 삶의 철학을 반영한 에피소드로 들렸다. 그가 툭하면 “나는 설령 로빈슨 크루소의 외딴 섬에 떠내려가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으며, 기와 위에 씨를 뿌려도 싹을 틔우고 꽃이 피게 할 자신이 있다”고 장담했다는 이야기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흔히 ‘혼다이즘’이라고 일컬어지는 혼다의 경영지침으로는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남의 흉내를 내지 마라. 둘째, 관공서에 의지하지 마라. 셋째, 세계를 겨냥하라. 여기에다 ‘만들어서 즐겁고, 팔아서 즐거우며, 사서 즐겁다’는 ‘세 가지 즐거움’이 보태지기도 한다. 그리고 ‘본업에 전념한다’는 사훈을 내세워 정치권과는 일절 교류를 거부한 것도 소이치로만의 고집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자신의 혈육을 끝내 기업으로 불러들이지 않은 것이 소이치로다운 가장 이색적인 기업관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은 주주들 모두의 것이지 어느 개인의 몫이 아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기업가는 물론이거니와 정치인들까지, 아니 하다못해 구멍가게에서도 세습이 일상화한 일본의 풍토에서 그것은 여간 돋보이는 고집이 아니었다.

당시 일부에서 소이치로의 동생이 중역으로 근무하는 것을 지적하며 은근히 비판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동생은 회사를 차리던 초창기부터 함께 일해 왔던지라 소이치로의 지론에 배치되는 예외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나이 66세 되던 1973년 가을, 느닷없이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경천동지할 발표를 했다.

“내 역할은 이제 끝났습니다. 오늘부터 사장 자리를 45세의 젊은 가와시마 군에게 넘깁니다. 앞으로도 혼다를 잘 부탁합니다.”

아직 한창 일할 나이에 평생 동지 후지사와 다케오 부사장과 나란히 일선에서 물러났다. 남들처럼 회장 감투를 쓰지도 않았다. 다케오와 똑같이 ‘최고고문’이라는 명예뿐인 지위를 지닌 채 은퇴한 것이다.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경영에 간섭하지 않았고, 때가 되면 스스럼없이 물러나는 이런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2008년 현재 혼다는 이 회사에서 잔뼈가 굵은 제6대 사장이 이끌고 있다. 소이치로가 자신보다 한 걸음 먼저 세상을 떠난 다케오의 장례식에 참석해 “(정열을) 불태울 만큼 불태운 뒤 우리는 함께 혼다를 그만뒀다. 행복했던 인생에 감사하네!”라고 한 추도사에는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나던 날의 소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소이치로가 쓴 책 가운데 ‘내 손이 말한다’는 것이 있다. 한시도 손에서 망치를 놓지 않았던 그이기에 왼손은 상처투성이였다. 또한 오토바이 레이스에 열중한 바람에 사고를 당해 몸에도 온통 상처가 남아 있었다. 소이치로는 그걸 빗대어 ‘상처투성이 인생’이라며 웃음 짓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천성이 남에게 뒤지길 싫어했다. 아무리 상처투성이에 기름때에 전 작업복 차림으로 살아도 1등 제품을 만들고자 애썼다.

일본 정부가 그의 공로를 평가하여 ‘훈(勳) 2등’ 훈장을 수여하겠노라고 타진해왔을 때의 일화다. 소이치로는 뜸도 들이지 않고 획 고개를 모로 꺾었다. 그러면서 “2등은 필요 없다”고 쏘아줬다. 머쓱해진 일본 정부는 훗날 소이치로 사후에야 ‘훈 1등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추서할 수 있었다.

오늘날 세계 제일의 자동차회사로 꼽히는 도요타의 본거지 지명이 도요타시(豊田市)다. 원래의 동네 지명은 고로모였으나 대다수 주민이 도요타 덕에 생계를 이어가는지라 아예 지명마저 도요타로 바꿔버린 것이다. 1959년의 일이다.

“발명은 연애다”

혼다는 미에현 스즈카시에 공장을 지었다. 처음에는 스즈카보다 조건이 나은 기후현 오가키시 쪽이 유리했다. 그런데 현지를 둘러본 뒤 소이치로가 스즈카를 택했다. 그 까닭이 평소의 소이치로다웠다.

오가키 시청을 방문하자 냉방이 잘 된 방에서 오렌지주스 대접을 받았다. 반면 스즈카 시청에서는 담당 공무원이 떫은 차 한 잔을 내놓더니 성실하고 열성적으로 유치 설명을 했다고 한다. 소박하면서도 열의에 넘치는 그 태도가 소이치로를 반하게 만들었다. 그 후 공장이 완공되기 직전, 스즈카시가 도요타시를 흉내 내듯이 지명을 혼다시로 변경하면 어떻겠느냐고 건의해왔다. 보고를 받자마자 소이치로는 즉석에서 이런 논리를 내세워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전통 있는 지명을 일개인의 이름으로 바꾼다는 것은 얼토당토않다.”

하기야 그는 회사 이름을 자신의 성을 따 혼다라고 지은 것조차 두고두고 후회했다. 걸핏하면 오랜 친구 이부카 마사루가 회사 이름을 소니로 한 것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발명은 연애와 마찬가지다. 괴롭다고 여기면 괴롭다. 즐겁다고 여기면 이토록 즐거운 일이 따로 없다!”면서 공장의 엔지니어들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다그쳤다는 소이치로. 두 바퀴(오토바이)에서 세계 정상에 서자 네 바퀴(승용차)로 시야를 넓힌 그는 동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89년 미국의 자동차전당에 모셔지는 영예를 누렸다.

그렇게 세상의 이목을 끈 인물이 되고서도 “비행기는 이륙할 때보다 착륙할 때가 더 어려워. 인생도 마찬가지야!”라고 엄살 아닌 엄살을 떤 괴짜 영감, 그는 너무나 아름답고 멋지게 착륙의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세인들로 하여금 또다시 감탄하게 만든 뒤 먼 길을 떠났다.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yacho@hanmire.com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웬 스테파니 홈페이지에서 담아온 이미지 (69년생이시란다...)






광고 동아리 후배 불멸작가 혜미네 미니 홈피 갔다가.
배경 음악으로 흘러 나오는 '그웬 스테파니(Gwen Stefani)'라는 분의 '하라주쿠 걸스(Harajuku Girls)'라는 노래를 들었다.

괜히 마음에 들어서 벌써 네번째 연속 재생으로 노래를 들으며 포스팅을 하고 있다.

노래는 영어 가사에 일본어 코러스가 들어가는데,
개인적으로는 일본어 코러스가 주는 강렬한 인상이 마음에 들었다.

갑자가 귀에 꽂히는 일본어 몇마디가 노래에 흥을 더했다고 할까?


노래는 대충 하라주쿠라는 곳에 있는 일본 여성의 패션을 찬미하는 것이다.
(내용에 무게를 두고 있지는 않다. ^^)


그웨인 스테파니라는 분을 약간의 검색을 해보니, 생각보다는 나이가 있으신 분(69년생) 같은데...

나름의 음악 분위기를 갖고 아티스트 쪽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듯 하다.




댄스 음악풍의 노래.
듣고 있으면 어깨가 살짝 살짝 들썩이는 클럽에 사용함직한 노래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간만에 흥미를 끄는 노래를 알게되어 방갑다. ^^


참. 문득 생각난 것인데...
언젠가는 영어 가사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 가사가 주는 스토리를 바로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ㅠ.ㅠ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웬 스테파니의 Love.Angel.Music.Baby 앨범의 자켓






관련 링크:

그웬 스테파니의 홈페이지: http://www.gwenstefani.com/
그웬 스테파니 네이버 인물검색 페이지: http://people.naver.com/DetailView.nhn?id=8834&frompage=nx_people

어보이님의 그웬 스테파니와 김윤아에 대한 비교와 그 둘을 좋아하는 이유



얼마전 블로그에 원더걸스와 관련하여 포스팅을 했었다.

내용은 그녀들의 Tell me의 댄스에 필이 꽂혔다는 것이었다.

그 포스팅을 작성할 때는 저런 흡인력 있는 댄스를 누가 짰는지 몰랐는데,

웹서핑을 하는 과정에서 '박진영'씨가 그 안무를 구성했다는
강풍님의 포스팅을 봤다.




내가 존경하는 몇 안되는 연예인인 '박진영'씨가 안무를 만들었다니,
놀랍기도 했지만 수긍이 가기도 했다.

(그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는 우리나라 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꾸었고,
계속 바꾸고 있는 문화 리더라고 생각해서이다.)

대충 이야기를 보니, 원더걸스가 박진영씨의 소속사에 있는 것 같은데,


 

위 동영상을 클릭해 보면 박진영씨가 안무를 짜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동영상을 보고 나면,
예전에 박진영씨가 보여줬던 섹시하고 부드러운 댄스와 맥을 같이 한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웹서핑을 하면서 느낀 것인데

의외로 원더걸스의 텔미가 장안의 화제가 되고 있고,
그 이유의 배경으로 '흐느적 댄스'가 인기를 모으고 있는 것 같다.

처음 동영상을 퍼올 계기를 만들어 준 태연이도 원더걸스 뮤비를 포스팅했었고, (
Tyworld의 포스팅)

내 친구 쟈니도 지가 보겠다는 목적으로 원더걸스를 블로그에 옮겨갔다. (
쟈니김 행복연구소 - 텟테데테뎃 테엘미~)

그리고, 링크를 따라 여기저기 둘러 보는 가운데,

그녀들의 흐느적 댄스에 반한 사람들이 꽤나 많다는 것을 알았다. (
고아라의 찌라시 블로그 - 온나라가 텔미홀릭)



여기서 얻은 결론은,

내 눈이 결코 독선적이지 않고, 내 눈에 괜찮아 보인 것은 다른 남자들의 눈에도 괜찮아 보이는 구나 하는 것이다.


혹시, 이런 맛에 여중고생들이 데뷔전 연예인들의 숙소까지 쫓아다니면서 에너지를 쏟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오랜만에 필이 꽂힌다 싶은 댄스가 박진영씨가 만들었다니,
괜히 내 안목에 우쭐하게 된다. ㅋㅋㅋ
내가 몸이 굳어 춤을 못 출지언정, 그래도 댄스 동아리 출신이라고.ㅋㅋㅋ


보태기 링크: 서울대 snulife에 올라온 텔미열풍과 귀여운 섹시미에 대한 컬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난번 클럽에 갔을 때 꽤나 인상적이었던 리듬의 가요가 있었는데,
(그 때는 집에 가서 꼭 무슨 노래인지 찾아 봐야지 생각했었는데...)

평소에 그런쪽에 레이더를 세우지 않다보니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어 그 때만 즐기고 말았었다.



근데, 오늘 내 컴퓨터에 예전에 받아 두었던 MP3를 듣던 중 그 노래가 있었다.


제목을 보니까 렉시(Lexy)의 "하늘위로(Remix)" 였다.

가사는 둘째 치고 (가사를 자세히 들어보지는 않았다), 리듬이랑 후렴구가 절로 몸이 움직이게 하지 않는가~ ㅋㅋ




나 이런 노래도 좋아한다. ㅋㅋ



오르세 미술관전을 보고 인상에 남은 작품들에 대해서 코멘트를 남긴다.
(이 글은 병원에 입원을 하고, 기억에 의존해서 메모한 것을 옮긴 것이다.)

덧. 아래 그림들은 인터넷에서 찾은 이미지이다.
최대한 미술관에서 봤던 그림과 유사한 색감을 찾을려고 했지만, 그림의 감동을 전해줄 수 있는 이미지를 찾는 것은 어려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를로트 뒤부르/ 앙리 팡탱 (실제 그림과 색감이 너무 다른데, 찾아 낸 이미지가 이것 밖에 없었다)


1. 내 방에 걸어두고 싶었던 그림이었다.
내가 열심히 정직하게 살았는가를 엄격하게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굳게 닫은 입술과 허리를 곧게 펴서 바르게 앉은 자세 때문인지,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내 자신의 바른 모습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내가 잘 못 했을 때 나를 혼내주시던 어머니의 모습과도 그림이 겹치는 것 같았다.
내가 살면서 신념이 흔들릴 때마다 그림을 바라보고 다시 나를 추스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페라 좌의 관현악단/ 에드가 드가


2. 역시 미술 교과서에 나올 법한 훌륭한 그림이었다.
악기를 불고 있는 연주자들의 역동적인 모습과 멀리 서 보면 그 존재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무대 위의 무희들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생각보다 크지는 않았지만, 회화에 드러난 묘사가 멋진 그림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교계의 밤/ 장 베로


3. 사진과는 차별화 되는 회화의 장점이 한껏 살아나는 그림이었다.
그림으로 눈을 끌어 당기는 붉은 색 커튼은 너무 색이 예뻤다. 그리고 검정색 정장을 입은 남성들 사이로 밝은 색 드레스를 입어 도드라져 보이는 여성들은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
내가 서양 미술을 좋아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유화로 표현된 여성들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는데, 이 그림에 표현된 여성들도 비록 작아서 디테일까지 볼 수는 없지만, 드레스의 윤곽으로 강조된 허리 라인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피리부는 소년/ 에두아르 마네


4. 피리부는 소년이 유명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도록에 따르면 배경을 회색 공간으로만 처리하고, 그림자 역시 손과 발에만 조금 나타냄으로써 오히려 인물을 강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다른 회화 작품에서 얻은 강렬한 인상을 작가가 자신의 기법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가 맞는가 보다.)
붉은색, 검은색, 흰색, 황금색이 뚜렷한 자신들의 색감을 드러내는 것이 그림의 매력이었다.
또, 꼬맹이의 터질듯한 볼이 너무 귀여워서 한 번 잡아보고 싶고, 동그란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같이 장난을 치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비꽃 장식을 단 베르트 모리조/ 에두아르 마네


5. 처진 눈과 하얀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이 그림 역시 미술 책에서 봤었는데, 실제로도 기억에 남을 만한 작품이었다.
약간 처진 눈동자는 역시 사람을 선량하게 보이게 한다는 것과, 하얀 피부는 검정 드레스와 모자로 더욱 밝게 빛난다는 것을 상기 시켜주었다.
화폭에 꽉 찬 느낌의 초상화가 보기에 좋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줄리마네(고양이를 안고 있는 아이)/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6. 다른 블로거가 평한 것처럼 애교를 부리고 있는 고양이가 너무 귀여운 그림이었다.
여자 아이의 경우는 눈이 크고 얼굴이 납작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으나, 거장의 작품이라고 알고 봐서인지 색감이 좋다는 생각이 머리 속을 꽉 채웠다. -,.-
여하튼 고양이가 넘 귀여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만종/ 장 프랑수아 밀레


7. 이번 회화전의 대표작이었던 '만종'
다른 많은 작품의 습작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다른 작품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고 하는 대단한 작품이라고 한다. 과연 어떤 점이 그렇게나 높은 평가를 받게 한 걸까?를 궁금해 하며 작품을 감상했다.
내가 낸 결론은 밀레의 작품은 그림자 속에 나타낸 사람의 표정이나 사물이 훌륭하게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그림자 속의 사람과 물건은 어둡기는 하지만, 의외로 포근한 느낌이 들게 한다.
만종에서도 저무는 태양을 등지고 있는 두 인물의 그림자 속 표정과 모습이 보는 사람이 경건함을 느끼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외에도 구도라든지 소재 등에서도 다른 작가들이 좋아할만한 요소가 많은 것 같았다.
작품이 만들어 질 당시 급격한 산업화의 단계에서 고향의 향수를 이끌어 낸 작품이라는 것이 기억이 남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르장퇴유의 강가/ 클로드 모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홍수때의 나룻배 / 시슬레


8. 두 작품이 나란히 걸어 있었다. 둘 다 파란 하늘에 떠 있는 하얀 구름이 시원해 보였다.
두 작품의 푸르고, 하얀 색감은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작품이 떠오르게 했다.
얼마 전 보았던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 자주 나오던 그 시원한 하늘 같기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르페우스/ 퀴스타브 모로


9. 이번 전시 작품 중 유일하게 신화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었던 것 같다.
'에피메데우스'의 죽음을 주제로 그린 이 그림은 역시나 스토리가 있어서 좋았다.
꽤나 큰 그림이었기 때문에 그림에서 받을 수 있는 압도감과 머리가 잘려서 현악기인 '리라'의 위에 올려져 있는 모습이 괴이한 느낌을 주었고, 곳곳에 숨어 있는 화려한 문양과 비통함인지 애틋함인지 알 수 없는 여성의 표정에서 그림을 단서를 찾아가는 재미를 주었다.




관련 포스팅 링크
http://blog.naver.com/saint420?Redirect=Log&logNo=100040221492
오르세 미술관 전시작품 목록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