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것은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할 것을 마주한다는 것이다.
내가 자주 하는 생각이고 표현인데, 사람이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해야 할 일을 피하지 않고 하는 사람이 된다’일 것이다. 사실, 어른이라는 것은 자기가 해야 할 것에 대해 무한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내가 한 생각, 행동,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식이었다. 할 일을 안 한 것에 대해서는 가볍게 혼나거나, 어려서 저렇다는 식의 핀잔을 들으면 되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천천히 알게 모르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에서 해야 할 것을 하는 식으로 행동이 바뀌어간다. 그토록 나가서 놀고 싶던 어린 시절, 대입에 가까워 올수록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아 묵묵히 공부를 하면서, 우리들은 당장 하고 싶은 것을 뒤로 미루어두는 인내를 배운다. 하지만, 나는 어떨까?
어린 시절부터 부쩍 사람들에게 조숙하고, 어른스럽다는 말을 들었지만, 정작 나는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에 익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고 보면, 그 동안 난 참으면서 산 시간이 길지 않다. 공부가 되었던, 군생활이 되었던, 동아리가 되었던 대부분 내가 즐거워서 했던 일들이고, 행동들이었기 때문에, 하기 싫은 것을 참으면서 해 본 적이 없다. 어떻게 보면 실패나 어려움이 없었던 무탈한 삶이 지속된 행운아인 것이다.
이제 사회에 나와 업무라는 이름의 피하면 안 되는 대상을 만나고,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며 나 자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즐겁고 행복할 줄 안다는 가치관으로 일관할 수 없는 경우를 마주하게 된다. 내가 한, 또는 내가 하지 않은 행동들이 나를 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과중하거나 어려운 업무를 외면하고 싶기도 하고, 때론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기도 하다. 또 지금 문득 느끼는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전화기를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도 싶다. 하고 싶은 행동들을 하는 것이 몸과 마음에 좋다는 것은 알지만, 매번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 내가 겪는 모든 상황들은 모두 내가 만든 것들이다. 업무가 많다면, 내 일 욕심이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이고, 지난 연휴기간 동안 마음이 허했다면, 그건 내 오만함과 부족함이 소중한 사람을 멀리가게 한 것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현재 내가 마주한 현실에서 쉽게 도망가지 못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내가 만든 상황이고, 그래서 내가 책임져야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탓할 수 없고, 어려움을 피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꼭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 할 것들이 마구 생기는 기분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사람은 어려운 것에서 쉬운 것으로 움직여 간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누구나 제약이 없는 자연스러움을 선호한다. 늦잠 자는 것이 편하고, TV를 하루 종일 보는 것이 좋다. 만화를 무작정 읽는 것도 좋고, 게임을 하는 것도 좋다. 일과 공부를 하지 않고, 매일 즐겁게 친구들과 놀 수 있다면 좋겠다. 사람이 나태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밤에 을지로입구역에서 집에 갈 때 보이는 홈리스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을 보면, 예전에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일을 하지 않고 서울역에서 주는 배식을 먹고 땅을 침대 삼아, 하늘을 이불 삼아 살아 가는 편안함을 알게 되면, 다시는 일을 하기 어려워진다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이 편안함을 쫓는 것은 비가역(非可逆)반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시 편안함에서 불편함으로 넘어오기가 쉬운 것만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불편함에서 편안함으로 내 성향이 바뀌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한번 맛 들리면 끊기 어렵다는 중독물질인양 편안함을 경원 시 했다. 어쩌면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민감한 대응이었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우리 회사의 경우 근태 관리를 엄하게 하지 않는다. 전날 늦게 집에 가면 오전 10시에도 출근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내 딴에는 항상 8시 반에 출근해야겠다 마음 먹었었다. 편안함에 익숙해지고, 내 스스로 나태해지는 것이 싫어서였다. 하지만, 2년째 생활에서 점점 내 안에 나태함이 독버섯처럼 자라나 9시 반에 출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나태해지는 것만이 아니다. 어쩌면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의탁하는 것도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오늘 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기 위한 이유를 내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산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쉽고, 더 큰 에너지를 발휘하는 손 쉬운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내 자신에게서 삶의 이유를 찾으려니, 은근 힘들기도 하다.
생각을 토해내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알게 되고, 자신의 논리가 만들어진다.
난 생각을 모두 정리한 상태에서 말을 꺼내는 타입은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 없이 말을 시작하여 낭패를 겪는 편도 아닌 것 같다. 평소에 해둔 생각들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고 말을 하면서, 어슴푸레 했던 생각들이 또렷해지는 편인 것 같다. 난 생각을 토해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스스로를 알게 되는 것은 물론, 내게 필요한 논리를 만드는 것이다.
컨설팅 업무를 하면서도 그렇다. 생각의 실마리를 잡았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멤버와 이야기를 나눈다. 멤버의 긍정 또는 부정적 대응에 맞추어 나 또한 이야기를 전개해가다 보면, 보다 공고한 틀이 갖추어지게 된다. 때로는 혼자 말하고, 혼자 ‘아! 맞다’라며 답을 할 때도 있다. 나 혼자 말하다가 혼자 깨달음을 얻어 결론을 내는 것이다. 이런 방식에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짧은 추석 연휴였지만, 최근 정신 없는 업무와 개인적 삶에서 살짝 떨어져서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너무 놀고, 너무 멍 때리고 있다가 3일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해야 할 것을 못 해놓고, 월요일을 맞는 다는 것이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결국 블로그에 포스팅까지 했으니, 나름 완벽한 연휴였다고 평가하자.
그 동안 내 생각을 블로그에 토해내기 너무 어려웠다. 또는 이야기를 했다가도 나만이 볼 수 있는 구석 깊은 곳으로 치워버리곤 했다. 이런 행동들도 일종의 도망이다. 꼭 결말이 이제는 도망가지 않겠다는 것 같지만, 그건 아니다. 그냥 그랬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블로그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내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다.
또 이렇게 지인들이 볼 수 있는 공간에 말을 하는 것은 사실 나름의 스스로에 대한 컨트롤 방법이기 때문에 주저려봤다. 오랜만에 말문이 트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