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만이 보이는 강가 풍경, 조세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1775~1851), 캔버스 유채, 93*123cm


목욕하고 나오는 다이아나, 프랑수아 부셰(1703~1770), 캔버스 유채, 56*73cm


난 화가는 아니지만, 누군가 내 앞에 새하얀 캔버스를 두고 간다면 무엇인가 굉장한 것을 그리고 싶고, 멋들어지게 작품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들 것 같다. 사실 능력이 안되니까 작품을 완성하지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4B연필이나 목탄을 들고 수평선이던 수직으로 곧게 뻗은 나무의 굵은 기둥이던 그 밑그림을 그리고 싶은 충동에 빠질 것 같다. 눈 앞에 놓인 새하얀 캔버스는 누구도 다녀간 적 없는 들판에 소폭이 쌓인 눈이나, 아무런 가구도 들여 놓지 않은 막 이사한 내 방 같은 설렘을 안겨 준다는 것에서 같은 느낌이다.


일반적인 남자들이 연하의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그런 설렘이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분명 어린 사람이 더 예쁠 수도 있고, 내가 가질 수 없는 젊음이라는 것이 부러운 것 일 수도 있고, 무엇이던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릴수록 세상의 때가 덜 묻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선입견이 들어 있지 않은 모습이 새하얀 캔버스가 주는 설렘으로 다가온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커가면서, 좌충우돌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고 이야기를 나누고 일을 같이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색깔을 자신의 캔버스에 옮겨 오게 된다. 부모님을 시작으로 존경하는 선생님, 하늘 같은 선배, 절친한 친구, 좋아했던 이성 같은 인생의 특별한 존재들은 특히나 라는 캔버스에 각자가 생각한 밑그림들을 그려 놓고 갔다. 그래서 지금의 남중이라는 그림도 수 많은 화가들이 협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 하겠다. 스케치도 중요하고, 색칠도 중요하고, 덧칠 역시 중요하다. 어떻게 보면 란 작품은 한편의 그림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주제에 대한 연작(連作)일 수 있다. 하나의 주제를 한 명의 화가가 그렸을 수도 있고, 여러 명의 화가가 그렸을 수도 있다. 비유한다면 하나하나의 그림들이 나의 가치관일 것이고, 살아가는데 있어 행동의 지침이 될 것이다.


적어도 난 작가적 기질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새하얀 캔버스의 설렘을 좋아한다. 누구도 선하나 긋지 않은 캔버스를 보면, 캔버스 위에 그려질 작품의 가능성첫 라인의 중요함에서 오는 책임감, 나중에 괜찮은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나름의 기여를 했다는 만족감으로 두근거리게 된다. 그래서 난 군대에서는 후임병이 들어왔을 때, 동아리에서는 후배가 들어왔을 때 그들에게 조심스런 한 획을 그을려고 노력한다.


잠깐, 첫 획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 이렇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등병이 부대에 배치되면 일병급에서 부대의 문화를 가르친다. 불합리해 보이는 것도 아무것도 모를 때 당연한 것이라 말하면 당연한 것이 된다. 신입생이 들어왔을 때 처음 만나는 선배가 야 공부 그런거 중요하지 않아. 원래 1학년때는 술 많이 마시고 놀고 하는 거야.라고 말하면 그 신입생은 정말 그렇게 한다. 하다못해, XX 교수님의 그 과목은 재미도 없고, 배워서 쓸 데도 없어 대충해.라는 이야길 들으면 그 교수님의 수업을 들을 때 아무래도 선입견이 생기고 영향을 받아 더 열심히 하고 교수님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기 쉽다. 이런 사소한 첫 획들이 정말 다른 결과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난 신봉한다.


아까 위에서도 말했지만, 하나의 인격체라는 작품은 연작(連作)일 것이다. 나에게 할당되는 캔버스는 수 많은 작은 작품들 중 하나일 것이다. 때문에 첫 스케치를 할 때는 그 동안 다루어진 주제들에 표현된 다른 작품들을 참고해야 한다. 사실, 그 작품들의 영향으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스케치가 만들어지지 않을 수 있기도 하다. 그걸 알기 때문에 후임병이나 후배가 들어오면 그 사람이 어떤 가치관을 가졌는지 알려고 노력하고, 그 안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을 보여준다. 그래야 내가 긋는 첫 획이 전체 작품에 미치는 영향도 커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분명 남자들이 연하의 여성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생각한 것과 유사한 이유도 있을 것 같다.



반대 입장의 이야기를 해보자.

나 역시 화가이자, 캔버스이다. 화가 입장에서는 아까 말했듯이 다른 작품들을 살피고, 작품들의 공통적 주제와 화가 자신의 개성을 섞어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이렇게나 복잡한 생각을 갖고 사람을 대하기는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 상대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붓을 휘두르기도 한다. 누군가 그려놨던 밝게 지저귀고 있는 종달새 위에 암회색 구름을 덮어 그릴 수도 있고, 투명했던 비너스의 피부에 붉은 색 상처를 낼 수도 있다. 때문에 캔버스 입장에서 좋은 화가를 찾아 적극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



난 내가 캔버스 입장이 되었을 때 신중하게 사람들을 사귄다. 어떻게 보면 란 작품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역시나 화가를 선택하는 캔버스인 자신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은 운이 좋았다. 너무 훌륭하고 밝은 화풍의 소유자들을 만나 나란 사람을 밝고 경쾌한 작품들로 채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좀 두서가 없게 진행 된 것 같은데

밥 먹을 시간이 다가와서 그렇다. ㅋㅋ


어설프게 결론을 내리자면, 난 화가인 순간에는 최고의 작품을 그려주기 위해 심사 숙고하는 좋은 화가이고 싶다. 그리고, 내가 캔버스인 순간에는 좋은 화가를 만나기 위해 노력하고, 마음에 드는 화가를 만났을 때는 그 사람의 많은 것이 내 캔버스 안에 담길 수 있도록 나를 열어두고 싶다.

그리고, 난 작가주의적인 성격이 있어서 새하얀 캔버스를 보면 끌리는 것이 사실이다.


덧> 위 주장은 순전히 제 개인적 주장입니다. 연구실의 모 선배님은 이 이야기를 듣고 말씀하시길... 새하얗고 그런거보다는 결국 이쁘면 장땡이라는 아주 설득력 있는 반론을 제기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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