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나의 모교 광성고등학교에서 교지가 나온다고 한다.
졸업생 글을 하나 실고 싶은데, 써달라고 해서 영광이라 생각하고 흔쾌히 수락을 했다.
최근 과제와 시험의 압박으로 차분히 글을 쓸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내 블로그에서 예전에 썼던 글 중 하나를 선택해서 고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예전에 내가 썼던 "내 자신의 지도를 넓혀라"를 수정했다.

다음은 모교의 교지를 맡으신 선생님께 보낸 글의 전문이다.


내 자신의 지도를 넓혀라
83회 졸업생 김남중

전략 시뮬레이션 문명III의 시작 화면


# 많은 전략 게임들이 처음 시작할 때, 지도를 검정색 그림자로 덮어 보이지 않게 한다. 예를 들어 스타크래프트의 경우 처음 시작하는 지역만 볼 수 있고, 나머지 부분은 탐색을 해야만 무엇이 그곳에 있는지, 과연 어떻게 지형이 생겼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현실도 그렇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등학생 때의 나는 세상에 무엇이 있는지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잘 몰랐다. 세상에는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등 익히 알려진 직업만 있는 줄 알았고, 대학의 전공도 몇 개 이외에는 알지 못했다. 또한, 내 수능 점수가 몇 점인지는 알아도, 나에게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다시 말해, 내가 가진 지도에는 아직 정찰되지 않은, 탐색해 본 적이 없는, 그림자로 덮인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 난 대학은 기계항공 공학과로 입학했다. 1학년 때 힙합 춤 동아리를 했고, 2학년 때부터는 광고 동아리 활동을 했다. 군대를 가고, 제대하고서 컴퓨터 공학과로 전과를 했다. 졸업을 하고 현재는 기술경영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하면 듣는 사람들은 참 이리저리 많이 왔다 갔다 했구나한다. 사실 그렇다. 나의 20여년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진로탐색의 시간’이라고 할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고등학생 때는 명확한 목표인 대입/수능점수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것은 볼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세상의 트렌드가 어떻게 되고, 어떤 직업이 유망한지, 행복을 위한 진로는 무엇이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인생 게임에서 내가 가진 자원과 환경을 이용한 제일 좋은 전략을 세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난 대학에 와서 좌충우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나에게 맞는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전략 수정을 할 수 있었다.

# 자신이 무엇을 잘 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에도 탐색이 필요하다. 대학 초년 시절 처음 힙합 춤을 배울 때가 생각난다. 간단한 동작인데도 정말이지 폼이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춤추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쉬운데 실제로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다. 그 때 처음 난 내가 몸치에 박자치인 것을 알았다. 공부도 그렇다. 난 전략적 사고를 잘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수업을 듣고 계획을 세워보고, 다른 사람이 발표하는 것을 보니까 갈 길이 멀었구나 생각이 들었다. 앉아서 생각하면 세상 일 뭐든지 잘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막상 해보려면 잘 안되고 못 하는 것들이 많다. 3시 방향에 적이 있겠구나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탐색을 해서 생각이 맞는가 알아봐야 한다.

# 넓게 밝혀진 지도를 가진 사람은 게임을 지배하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다양한 경험은 사람에게 명확한 가치관과 판단의 기준을 제공해 준다. 어떤 대학을 선택할 것인가만 생각한다고 해도, 학생마다 판단의 기준이 달라진다. 일반적인 학생이라면 성적, 캠퍼스 환경, 부모님의 희망, 그리고 하나 더 보탠다면 여학생들의 외모 수준을 고려해 대학을 결정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학생은 공부하고 싶은 분야에 대한 각 대학이 가진 장점, 저명한 교수님의 유무, 학교의 비전과 자신의 꿈의 비교 등을 통해 대학을 선택할지도 모른다. 다른 예로 내 이상형을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전에 이성에 대한 내 이상형은 그저 느낌이 좋은 여자, 현명한 여자였다. 모호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점점 난 어떤 여자에게 끌리고, 어떤 타입은 싫어하는 구나 점점 기준이 명확해 졌다. 결국 사람은 배움의 동물답게 겪어 보지 않고, 생각해보지 않은 것에서는 최상의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것 같다.

# 내 좌우명 중 하나가 항상 배우고, 항상 업그레이드 한다는 것이다. 그랬던 나였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 겁도 없이 혈혈단신 일본으로 유학 갈 수도 있었다. 군대역시 미지의 경험을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갔었고, 내가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많은 것을 배웠고, 나란 사람의 지도에서 많은 부분을 정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대를 하고 내 일상은 단조롭게 바뀌었다.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것을 하기 보다는 내가 익숙하게 하던 것만 하게 되었다. 만나던 친구만 만나고, 놀았던 지역에서만 놀고, 하던 공부만 한다. 익숙해서 너무 좋다. 바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다. 내가 생활하는 곳, 내가 하는 일은 모두 예전에 밝혀 놓은 지도 안에 있는 거다. 즉, 내가 점령한 지역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 편하고 좋은 것이 이젠 내게 독이 되어 감이 느껴진다. 오랜 동안 연애를 안 하면 몸 안의 연애세포가 죽는다고 한다. (물론 신빙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래 동안 어떤 새로운 일에 도전을 안 하면 몸속의 용기세포가 죽는 것 같다.(이건 지금 내가 지어낸 말이다)

# 경험해 보고, 탐구해 보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 정찰을 하지 않는다면 검정색으로만 나타난 지도를 밝게 채워나갈 수 없다. 여성에 대한 이상형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이 그렇다. 고등학생이면 하고 싶은 것이 많을 것이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고등학생 때도, 앞에서 언급했듯이 일상의 편안함에 묻혀, 미지의 영역에 대한 정찰을 포기하고, 이미 밝혀 놓은 그 영역에서만 안주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미 내가 잘 한다는 것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친한 사람만을 사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고등학교라는 울타리 속의 삶에 익숙해 더 큰 세상에 대한 관심은 가지지도 않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선배로서 고등학생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인생 게임에서 더 큰 전략을 짜기 위해 10대, 20대에 가능한 넓은 영역의 지도를 밝혀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잘 하고, 무엇에 흥미를 가지며, 어떤 사람과 잘 어울리는지. 세상에는 어떤 진로가 있고, 어떤 직업이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자신과 세상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필요하다. 지금 내가 가진 나에 대한 생각은 틀렸을 가능성이 너무 많다. 실제로 겪어 보고 나를 깨달으라 말하고 싶다.

# 방학이 되었을 때 PC로 오락만 하지 말고, 가을 하늘을 보고 삶에 대한 사색에 잠겨보거나, 만화나 무협지 외의 책을 읽는 것도 권하고 싶다. 또는 담임선생님의 소개로 졸업생을 만나 대학생활에 대해서 들어 보는 것도 좋은 탐색활동이 될 것이다. 물론 새로운 것을 하는 데는 용기와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10대의 가장 큰 무기는 무모하리만치 넘치는 에너지와 용기 아닐까? 그 용기와 에너지를 자기 자신의 지도를 넓히는데 썼으면 좋겠다.


처음 저 주제로 글을 쓸 때도, 이야기의 대상은 나였다. 제대를 하고 용기와 에너지를 잃어가는 나 스스로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을 하고 싶었었다.
후배들에게도 왕성한 활동을 하라고 표현을 약간 바꾸어 이야기를 건넸지만,
역시나 이번 글도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란 생각이다.
화이팅 김남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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