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장.

[xo] 내 자신의 지도를 넓혀야 겠다.

xonamjoong 2005. 12. 21. 19:25

문명III에서 처음 게임을 시작할 당시 보이는 지도는 겨우 저 만큼이다.


# 많은 전략 게임들이 처음 시작할 때, 지도를 검정색으로 보이지 않게 한다. 예를 들어 스타크래프트의 경우 처음 시작하는 부분만 볼 수 있고, 나머지 부분은 탐색해야만 무엇이 그곳에 있는지, 과연 어떻게 지형이 생겼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아직 상상만 해본 일에 대해 내가 과연 실제로 얼마만큼의 성과를 낼 수 있는지 장담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 즉, 나에게도 아직 정찰되지 않은, 탐색해 본 적이 없는, 그림자로 덮인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 대학 초년 시절 처음 춤을 배울 때가 생각난다. 연습실에서 간단한 투 스텝을 연습하는데, 정말이지 각이 나오지 않았다. 난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그렇게나 박자치에 몸치인지 몰랐었다. 머리 속으로 춤 추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쉬웠기 때문이다. 또, 군대를 전역하고 오랫동안 춤을 추지 않다가, 몇일 전 ‘멜론’ 광고에 나오는 댄스 배틀 편에 나오는 춤을 개인기로 익혀 보자는 생각을 하고, 좀 따라 해봤다. 처음에는 그래도 예전에 춤 췄던 것이 있는데 좀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내 몸이 굳었다는 것을 알았다. 춤과 비슷하게 내 전공에서도 내 능력은 생각보다 작았다. 어떤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자료구조는 무엇으로 하고, 알고리즘은 어떻게 하면 될 거다라는 방법을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구현에 있어서 생각만큼 결과를 얻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즉, 내가 아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 내 좌우명 중 하나가 항상 배우고, 항상 업그레이드 한다는 것이다. 그랬던 나였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 겁도 없이 혈혈단신 일본으로 유학 갈 수도 있었다. 또 군대역시 내가 해 보지 못할 경험을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갔었고, 내가 해 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봤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많은 것을 배웠고, 나란 사람의 지도에서 많은 부분을 정찰할 수 있었다. 난 항상 긍정적이고, 평범한 일은 처음에는 배우고, 두 번째는 실수 하고, 세 번째부터는 응용을 할 수 있다. 또 작은 아이디어를 내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을 궁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것들이 내가 그 동안 찾아낸 지도의 그림자 속 내 모습이다. 하지만, 최근 나란 사람의 검정색 지도들은 더 이상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비록 얼마 전 취업을 준비하면서 굉장히 많은 나의 부족한 점과 경쟁력 있는 몇 가지를 알게 되었지만, 그 것을 제외하고는 통 새로운 지역에 대한 탐구가 없다. 돌이켜 보면, 군대를 전역하고 그저 학업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매일 반복되는 도서관 속에서의 삶은 내게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일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것에 길들여 졌다고 생각된다. 오래 동안 연애를 안 하면 몸 속의 연애세포가 죽는다고 한다(물론 신빙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래 동안 어떤 새로운 일에 도전을 안 하면 몸 속의 용기세포가 죽는다고 한다(이건 지금 내가 지어낸 말이다).

# 사실 오늘 이런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내일 여자 후배와 영화 약속을 잡았다. 지난 주 금요일 동아리 송년회 자리에서 오랜만에 본 후배인데, 때마침 서로 솔로이기에 내가 영화를 같이 보자고 한 것이다(나름의 데이트~). 00학번이니까 나와는 두 살 차이이다. 오늘 영화 애매를 하러 가서, 시간을 정하기 위해 전화를 했다. 반가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이차이가 별로 안 나다 보니까 “오빠, 나중에 봐”와 같이 편하게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난 약간 어색함을 느꼈었다. 아마도 동아리에서 워낙 어린 후배들이 나를 어렵게 대하며 대부분 존대를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때 생각한 것이 ‘난 여자친구로 어린 사람을 더 좋아할지 모르겠다’ 였다.

# 나란 사람의 지도에서 내 이상형에 대한 영역은 아직 미지의 세계인 부분이 많다. 다른 사람들이 내 이상형에 대해 물을 때, 대학 초년 시절에는 그저 느낌이 좋은 여자가 내 대답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내 이상형에 대한 영역을 어림짐작 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랬는지, 참 이상적인 남자가 바라는 이상형을 가지고 있었다. 난 내가 멋있는 놈일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때는 키도, 외모도, 흡연 여부도, 머리 스타일도, 피부 색도, 학력도, 몸매도 다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다. 난 그런 줄 알았다. 그저 이 모든 것을 포함해서 좋아하게 되면 좋은 거고,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은 줄 알았다. 그래서 그저 현명한 여자에 느낌이 좋은 여자면 OK라고 했다. 그때의 난 다른 사람들이 긴 생머리에 치마가 잘 어울리고, 피부는 하얗고, 키는 160정도인 여자가 좋다는 식의 이상형을 말하면 그저 성급한 척도화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이 그들 자신에 대해 그 만큼 잘 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여성에 대한 이상형이란 부분을 정찰했고, 자신의 인식 속에서 그 부분이 어떤 지형을 이루고 있는지 아는 거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도 조금씩 내가 어떤 여성에게 끌리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경험해 보고, 탐구해 보지 않는다면 내 자신을 알 수 없다. 정찰을 하지 않는다면 검정색으로만 나타난 지도를 밝게 채워나갈 수 없다. 여성에 대한 이상형 뿐만 아니라, 내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이 그렇다는 생각을 했다. 하고 싶은 것이 많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많다. 하지만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모른다. 지금의 내 문제는 여기에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지금의 내 모습은 정찰을 포기하고, 내가 밝혀 놓은 그 영역에서만 안주하고자 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과 만날 생각만 하고, 일을 하는 것도 내가 익숙한 것만 하려고 들고, 생활을 하는 것도 지금의 모습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큰 전략을 짜기 위해 20대에 가능한 넓은 영역의 지도를 밝혀 놓아야 한다. 내가 무엇을 잘 하고, 내가 무엇에 흥미를 가지며, 내가 어떤 사람과 잘 어울리는지. 나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필요하다. 지금 내가 가진 나에 대한 생각은 틀렸을 가능성이 너무 많다. 실제로 겪어 보고 나를 깨달아야 한다.

# 새로운 것을 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어쩌면 지금 내가 필요한 것은 그 용기인 것 같다. 예전의 겁 없이 까불던 그 때로 돌아가자.